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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Sep 08. 2023

자주, 내가 사라지길 바랐어

천 년의 주령구 04

 의주는 목이에게 들은 이야기와 교과서와 학습만화에서 보았던 이야기의 조각을 하나하나 이어갔다.

빛나는 천년의 역사, 삼국통일. 장보고 뭐 이런 걸로만 알았던 옛 나라의 나머지 부분들을 하나하나 이어보니 그 시절도 지금 의주가 살던 시절처럼.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굳이 그걸 겪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달랐고, 가끔은 모든 사람이 겪는 불행이 사람들을 뒤흔들었고, 악랄한 사람들은 아주 일상적으로 자기의 편리와 즐거움을 위해 뭐든 하는 꼴이 지금과 비슷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귀한 금관을 쓰지도 않았고, 모든 사람이 로만글라스로 물을 먹지도 않았고 또 모든 사람이 불교를 믿은 것도 아니었다.  목이의 가족이 그래서 좀 특별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의주는 역시 그 이팝나무 앞에서 목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살았던 그 네가 말하는 '여관'은 정말 여러 사람이 지나다녔어. 머리에 천을 두르고 반달모양의 칼을 두른 사람. 혹은 멋진 옷을 입고 묵주와 두꺼운 책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 당나라 사람은 물론, 옛날 가야나 백제에서 왜로 건너간 사람들은 계속 우리와 비슷한 말을 쓰고 있어서 말을 나누기 비교적 편했어.

일은 힘들었는데, 손님들이 진귀한 물건들을 남기고 가거나 가끔 주기도 해서 그 재미가 나쁘진 않았어.

이게 엄마가 가르쳐주는 말글 때문이었던 것 같아.

엄마는 반은 당나라 사람이야. 할아버지가 당나라 사람이었거든. 엄마가 있던 동네는 덩치가 산만한 마자르 족이 자주 왔다갔다 했대. 그런데 마자르 족이라고 다 착하진 않았고 개중 잔인한 도적떼가 있어. 마자르 족 안에서도 이 사람들은 골칫거리였나봐. 어느날 엄마는 아주 기분나쁜 꿈을 꿨대. 엄마는 그 마자르족으로 이뤄진 마적떼가 휩쓸기 전 이상한 꿈을 꿨대. 엄마는 꿈을 잘 꾸고, 생생하게 기억을 해냈고, 그 꿈이 자주 앞의 일과 일치했다고 해. 아무래도 그 꿈이 심상치 않을걸 느꼈던 엄마는 서라벌로 내려왔어. 엄마보다 한참은 어렸던 여동생의 손을 붙들고. 엄마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대 심지어 부모님 조차도, 결국 나중에 건너 건너 확인했대. 살던 곳이 초토화 되었고, 가축과 곡식들이 싹다 없어졌고 집이 다 불탔다고. 심지어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도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거야. 엄마가 살던 그 지역은 '경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이었어. 정확히 뭔지는 엄마가 설명을 해주진 않았어. 그냥 많이 좀 달랐던 거 같아. 엄마는 여러 말을 할 줄 알았어. 그걸 이모에게 가르쳐 줬고, 이모는 나에게 알려줬어. 다양한 글씨도 쓸 줄 알았고. 한 번 볼래?"


의주는 가방을 뒤져서 연습장과 볼펜을 내밀었다. 그리고 목이 앞에서 글씨를 썼다. 이렇게 하는 거라 알려줄겸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이건 한글이야 못 읽겠지만. 곧 가르쳐줄게. 원한다면

목이는 그걸 유심히 지켜보더니 글자를 한 개씩 썼다.


Credere
मृत्यु
欺罔


"야, 너 대단한데. 지금 태어났으면 통역, 번역으로 돈 좀 벌었겠다."

"응 가끔은 상인 일 도와주면서 물건이나 돈 받아서 이모 주고 나중에 엄마 만날 때 주려고 금반지 사놨었어

결국엔 못줬지만"

"무슨 뜻이야"


목이는 쓴 글자를 하나씩 가리켰다.


"크레데르, 비잔틴에서 온 아저씨가 알려준 것. '믿음'이래. 장사는 사실 믿음을 팔고 사서 그 밑천으로 먹고사는 거라고, 그다음은 산스크리트어로 마르만이라고 '죽음'을 뜻해, 마지막은 너도 알듯이 한자로 '기망'이야."


의주가 대답했다. "나 한자 약해서 사실 잘 몰랐고. 왠지 이 세 단어 그냥 떠올린 거 아닌 것 같은디"

목이는 가만히 자기가 쓴 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네"

그러고 갑자기 말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의주는 알았다. 팔을 감춰야 하는 날이 종종 있었다. 아빠가 엉망으로 군 날 팔에 들어있는 멍자국 혹은 기운 빠져있는 표정을 우연히 알아챈 친구가 아무 말 않고 기다려줬을 때 바로 이 마음이었겠구나 싶었다. 말을 하다 멈춘다는 건 말로는 표현 안 되는 것이 잔뜩 있어 그걸 고르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필요하단 거다.

오래 기다리진 않아도 됐다.

"너 이야기와 좀 비슷하긴 해. 너네 아빠만큼 우리 엄마를 그렇게 만든, 나까지 이렇게 만든 아빠라는 사람 생각을 하다 보니 쓰게 되었다.

엄마는 발해에서 내려올 때 가진 패물을 팔아 버텼다나 봐. 그러고는 뭘 해서 살아남아야 할까 생각했었대. 처음엔 항구에서 상인들의 말을 번역해 주고 장부를 도와주면서 신라에 적응을 한 거야. 그러다 만난 사람이 아빠. 이상했대. 처음 만난 날 엄마의 과거를 줄줄 읊더래.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옥령'이라는 엄마의 이름도 이모의 이름도 알았고.  엄마는 경교공동체의 사람이라 '예언하는 사람'은 좀 봐서 그런 부류인가 싶었고 묘하게 친근감이 들었어. 그 사람이 당신은 '역'을 해야 한다고 해서 뛰어들었는데 의외로 먹고 살만은 해진 거야. 여동생도 돌볼 수 있었고.

그 사람을 믿게 되었고, 이건 이모 말인데 얼굴도 나이도 다 별로였는데 이 사람은 도움이 되겠다 싶어 결국 짝이 되고 나를 낳았고.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나봐. 아버지란 사람의 이름은 '돈염'인데, 이게 몇 번이나 바꾼 이름 중 하나여서 원래 이름은 몰라. 엄마를 처음 봤을 땐 같은 발해 유민이라고 하더니 어느 정도 관계가 확실해지고 나서야 사실 왜에서 건너온 백제 유민이라고 했대. 그러다 어느날 술을 잔뜩마시고는 사실 가야 귀족의 후손이고, 나라가 무너졌을 때 왜로 건너갔다고 하기도 하고... 뭐 여튼 고관의 아들에게 점을 쳐주고 도움을 줘서 한 밑천 얻어 신라로 왔다고. 그리고 또 말할 때마다 바뀌어.  밀교의 승려노릇도 잠깐 했다고 하고, 자기도 견당사 따라 당나라에 다녀왔다고 하는데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나 봐. 그렇게 출신이나 살아온 배경을 복잡하게 숨길 필요는 없었는데 왜 숨겼는지 아직도 이모는 궁금해해.

엄마에게 살갑고 여러 도움을 준건 딱 날 낳기 전까지만이야. 손님도 물어오고, 역의 일도 많이 돕고 손님들에게 점을 봐주면서 돈을 좀 벌면 그걸로 엄마와 이모에게 장신구와 옷도 사주고 그랬다나봐. 그러나 나를 낳고 나서 그 이후로는 뭐 너희 아빠랑 비슷해. 비교하긴 그렇지만 좀 더 음침하고 야비했다고 해야 하나. 투전판에도 자주 다녔고, 지조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이랑 돌아다니고 패물을 사주며 엄마의 재산을 자기 재산인양 하는 거 있잖아. 여자만 사귀는 게 아니라 남자도. 어느 날은 예쁘장한 남자애가 엄마한테 와서는 갑자기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 치더니 '너는 비참하게 죽을 거라'라고 저주를 퍼붓고 갔는데,  알고 보니 아빠의 숨겨둔 애인이었던 거야. 아빠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어. 뭐 그렇게 엄마의 재산을 야금야금 빼돌리고, 자꾸 이상한 짓을 했대.

마구간에서 크고 작은 가축들을 관리하는 일을 이모가 했었는데 어느 순간 자꾸 한 두 마리가 비더래. 일하는 사람을 시켜서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빠가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과 그걸 데리고 와서는 아주 잔인하게 칼질해 죽이고, 전혀 들어보지도 않았던 주문을 외우면서 이상한 문양을 피로 그리더래. 그 외에도 입에 담지 못할 짓들을 했다는데 결국 다는 못들었어. 그 꼴을 보고 일단 토하고 며칠 밥을 못먹었다나봐.

이걸 이모가 엄마에게 이야기했어.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더는 당신과 못살겠다 했더니 의외로 순순히 나가더래."

"와 너도 뭐 엄청난 걸 보고 겪었구나."

"그리고 엄마는 팔려갔어. 아빠가 팔았더라고"

"아..."

"아빠는 그냥 즐거움을 위해서 남녀 가릴 것 없이 사귄 게 아니라 그게 누군가에게 닿기 위한 징검다리라 스스로를 판 거더라고. 뭐 볼 거 있다고 그랬는지 몰라도 아빠가 아마 사람 홀릴 때 피우던 향을 좀 사용했을 거야. 아니면 그 피냄새 잔뜩 나는 짓을 했든가. 여하튼. 그렇게 몇 년을 하니 결국 김위홍이라는 사람과 닿게 되었고 그 사람을 위해 뭐든 하겠다고 했다나 봐. 아빠는 야망이 컸어. 엄마도 그 징검다리 중 하나였을지도 몰라.

월성의 사람들이 들이닥쳤고, 엄마는 닥쳐올 일을 알았는지 내가 마지막에 쓴 저 글자를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쓰고 있었대. 엄마는 그냥 순순히 끌려갔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계속 울더라.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갔다나 봐. 다른 건 기억 안 나고 엄마가 안아줬던 것 눈물이 내 볼에 떨어졌던 건 기억해.. 이상하게도. 자세한 기억은 아마 이모가 내게 해준 말과 섞여서 만들어졌을 거야."


그렇게 목이의 엄마 '옥령'은 사라졌고, 얼마 안 있어 목이는 이모와 어떤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언니를 첩이자 '거울용도'로 팔았다고, 애초에 그걸 알아보고 저 돈염이라는 작자가 언니를 이곳에 자리 잡게  했고 끌고 온 거라고.


"이모가 불쌍해. 모든 것을 잃었고 나만 남았는데, 내 얼굴에 가끔 아빠의 흔적이 보일 때면 이모는 나를 피해서 며칠을 방에 틀어박히고 말도 잘 걸지 않았어. 그러다 이모는 엄마가 그리울 때면 나를 안고는 그렇게 울었어. 나를 제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거야.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결국 이모는 나를 엄마처럼 아끼게 되더라. 사실 그전까지는 많이 힘들었어. 다 나 때문인 거 같아서.

자주 내가 사라지길 바랐어."


의주는 주머니에 있던 머핀 하나를 목이에게 나눠주며 말했다.

"네가 사라진다고 그놈이 죽는 게 아니면 사라지는 건 그냥 낭비 아닐까? 그냥 그놈이 뒈졌으면 좋겠는데. 나도 차라리 내가 애초에 없길 바랐는데, 그걸 엄마가 바란게 아니더라고. 나는 엄마하고 약속했어 아빠란 놈이 뒈지는 날 내가 직접 케이크 만들어서 촛불 불자고"


목이는 머핀을 받아 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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