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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Jun 01. 2023

나무속에서 나온 아이

천 년의 주령구 02


집안에서는 매일이 전쟁이었고 공포였지만 학교만큼은 내게 그나마 휴식이 되어 주었었다.

이사에 이사를 거듭했을 때도 끝끝내 집 근처나 앞까지 추격해서 위협했던 아빠는 그나마 학교까지는 못 찾아왔다. 다니던 학교 바로 옆에 경찰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었을 테고. 학교보안관의 존재를 의식했던 것 같다.

그 여자 중학교에서 신 선생님을 만났고 도움을 받기도 했고, 아이들은 그저 자기 고민에 바쁜 부류와 태생이 착한 부류로만 내 주위에서 살아줬다. 드디어 경주로 이사할 때 다른 건 아쉽지 않았는데 아이들과 헤어지는 게 제일 마음이 뻐근했다.

그러나 이곳, 그러니까 집에서는 버스를 두 정거장 정도 타고 가야 하는 중학교에 전학 오고 한 두 달 지나서 조금 불편해졌다.

사람도 별로 없는 공학. 인구수가 적어 반 아이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들도 거의 무심하거나 착했다.


그러나 꼭 하나씩은 이상한 아이가 있기 마련이다. 등교하고 사물함을 열어보니 그야말로 구겨진 종이가 들어있었고 펼쳐보니 참 낯익은 글씨가 보였다.

[임의주. 나대지 마. 창년아. 아무한테나 다 대주고 다니는 개창년아. 건방진 년아. 주제 모르고 날뛰어! 알아서 눈깔고 다녀.]

누가 쓴 건지 대번 알았다. 강인섭.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칭 이 반의 최고 똑똑한 아이. 누나 셋에 아들 하나. 이 아이는 분명 서울대에 갈 거란 기대를 받고 자란 남자애였고. 내가 이 학교 전학을 와서 중간고사 점수와 수행평가 점수로 이 아이를 밀어내기 전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호의적이었다. 그 호의를 표하는 방식이 좀 더러워서 그랬지. 내가 다른 아이랑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 없을때 부러 다가와서는 내 팔 안쪽과 몸통을 슥 쓰다듬고 갔었고 나는 놀라서 그 즉시 크게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의 이목이 바로 쏠렸고, 나는 무안해서 '아 벌레야'하고 대충 넘어갔다. 기분은 나빴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혹시라도 실수일 수도 있으니...라고 생각하며 그 일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러나 그 아이에겐 그 일이 인상 깊었던 거 같다. 나를 노려보는데 꼭 내가 찢어져서 없어질 것 같더라. 참 신기한 아이.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할거라는 생각자체를 혹은 남의 선을 지켜주는 거는 배우지 못한 아이. 똑똑하고 촉망받던 집안의 이쁜 아들 '강인섭'이의 역린은 성적이었다. 한마디로  '감히'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나는 아빠라는 사람의 폭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터라 웬만한 폭력에는 대응할 준비가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인섭인 의외로 나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거나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혹시라도 학폭위가 열릴 짓을 안했다. 뭘해도 자기라는게 티가나는 SNS댓글테러도 안했다. 난 일단 게임을 안했으니 디스코드로 쌍욕들을 일 자체가 없었고 SNS라 해도 계정에 엄마랑 어디서 밥먹은 사진 몇 개밖에 안올라온 인스타만 했고 블로그나 트위터는 안했으니 익명이나 알계공격 자체가 불가능한 면도 있었다. 꼬리밟힐 짓은 되도록 안하는 걸 보니 강인섭이는 머리가 영 나쁜축은 아니었다. 그러니 성적이 괜찮았을 수도 있다. 다만 사투리가 매우 심한 축에 속했고 부러 털털한 척 해대지만 누구보다 남 눈을 의식하는 스타일. 착한척 하지만 뭔가 뚝딱대고 수동공격에 능한 친구라 묘하게 사람을 골질을 했다.

그도 그럴게 마르고 작은 나랑 비슷한 체구에 벌써 피부는 호르몬 세례로 울긋불긋했다.

또래 남자애들과 좀 떠들썩하게 돌아다니고 농구라도 하면 땀이라도 빠지고 스트레스도 풀릴텐데. 영 그 스타일은 아니었나 보다. 또래 애들도 굳이 그 아이를 따로 챙겨주거나 하지 않았다. '알아서 공부 잘하고 혼자 잘 놀겠거니'해서 그대로 뒀다. 그저 모 커뮤니티에서 나름 네임드라며 좀 말도 안 되는 글을 쓰고 조회수로 즐거움을 찾는 부류였던 강인섭.  열등감을 극복할 유일한 성적에서 밀렸으니, 그것도 '유일한 아들', '사랑받는 남학생'인 내가. 뭐 그래서 열받았다는 건데... 그러기엔 적이 그 아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 쪽지를 그 상태로 사진으로 찍었고, 하나는 실물과 함께 담임선생님께 보내드렸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끼리 만든 오픈챗방에 올려버렸다.

[누가 이런 쪽지 보냈는지 알아. 그러나 할많하않. 혹시 이 글씨 아는 사람 있어도 말 말아줘. 너무 자닌 하자낰ㅋㅋㅋㅋ 그나저나 허위사실이네. 억울해. 저는 건방지지도 않고 모쏠입니다. 아무한테나 대주지도 않아요. 그 아무나가 누군지 좀 알려줘. 그나저나 햇살우유 크림빵 새로 나왔는데 나랑 먼저 선점하러 갈 사람. 하트 찍어!]

하트가 적어도 15명 이상은 찍혔고, 강인섭은 나가버렸다.


그렇게 했지만 영 기분은 꿀꿀했다. 그 쪽지 공유 다음 날은 개교기념일이었고 나는 어제 친구들과 함께 편의점 순례에서 당당하게 구한 햇살우유 바닐라 크림빵 하나와 과일주스 하나를 들고 마석산 중턱에 올랐다. 그 나무. 이팝나무에 기대서 이 모든 심경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가뜩이나 살기 힘들고 아파서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가만히를 두지 않냐."

그날은 유독 그 이팝나무의 가지 하나가 부러지지도 않았는데 내 옆으로 축 하고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냥 엄마랑 무사히 살고 싶었어. 해를 끼쳤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아. 나처럼 아빠가 엎은 상에 있던 뚝배기에 팔을 데어보지도 않고, 엄마랑 막대걸레로 맞아보지도 않고 아님 애비가 휘두른 깨진 병에 등이 찢기지도 않고 그저 멀쩡한 부모랑 누나들 보살핌 받으며 편하게 살면서 뭘 그리 욕심을 내는지... 왜 창년이라고? 나 걔 몰래 쉬는시간에 야애니 보는 거 암말 않고 넘어가줬는데, 걔는 모든 여자가 다 야애니 주인공으로 보이나 보다. 그거 들켜서 더 그러나? 창피하면 안 보면 되잖아. 개새끼!"


갑자기 머리 위로 이팝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가지가 사람 팔처럼 굽더니 내 머리 위에 우산처럼 감쌌다. 다람쥐라도 올라간 건가? 일어나서 아무리 찾아봐도 다람쥐는 없었다. 그리고 보통은 그 나무에 새 몇 마리는 깃들었는데 그날은 새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 뭐지?"

뭔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자리를 뜨려던 찰나 다른 가지 하나에 발목이 걸렸다.

'오늘 이 나무가 왜 이러나? 아 괜히 저번에 유튜브에서 식물에 깃든 영혼 같은 이상한 괴담을 봤다. 내 탓이다. 내 눈을 탓하자'

발목을 빼내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신발을 만지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의 발이 보였다.


"저기. 해가 지려면 얼마나 남았어?"

그저 평범한 또래 남자애 목소리라 공포심이 잦아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무슨 삼국시대 사극 촬영장이나 중국 선협물에서 나온 옷을 입은 남자애가 내 눈앞에 서있었다.

그 아이는 손을 눈에 대고 지금 시간을 가늠하는 듯했다.

"너 누구야?"

"나는 목이"

"어느 중학교 다녀? 아니 고등학교 다녀?"

"응?"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키가 자못 컸다. 그러나 얼굴은 매우 앳되었다. 잘 살펴보니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니 꽤나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애였는데 외커풀에 눈이 길어 잘생겼어도 느끼하거나 부담가지 않는 인상이었다.  

"너 혹시 아이돌 연습생이야? 여기 촬영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알게 됐다.

'아 안 되는 데 지금 나오면 안 되는데'

"혹시 너 촬영땡땡이친 거니?"

아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기 너 그동안 나한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다 했었지?"

"응 뭔 소리야?"

"잠깐 앉아봐"

참 이상한 게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이 심한 편인데도 나는 이상하게도 그 아이와 좀 말을 나누고 싶었다.

아빠 그리고 그동안 가끔 만났던 나쁜 어른들은 일단 자기가 겁을 먹는 게 아니라 남을 겁주었고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말을 걸기보단 일단 욕을 하거나 팔을 잡아당기거나 끌고 가려 하거나 혹은 오늘 강인섭처럼 음습하게 더러운 쪽지나 보내고 괜히 토를 달거나.

그러나 이 해사하고 예쁘장한 아이는  다른 게 아니라 무척 겁을 먹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자기의 문제가 너무도 커서 나에게 공격할 겨를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폭력을 당하고 위협을 당하다 보니 '감각'이라는 게 발달이 되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해로운 사람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 아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이팝나무 아래에서 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어떻게 안 거야 다"

"아, 이 나무가 내 본체?... 아니 머무는 곳이야"

"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얘는 누구지? 아이돌 연습생도 보조출연자도 아니고 빨리 핸드폰을 검색했는데 내가 검색한 한계 내에서는 경주나 신라를 주제로 한 드라마 촬영 계획은 없었다.

나무에 머무는 아이라. 정신이 이상한 건가? 그러기엔 나에게 전해준 나의 이야기가 너무 또렷하고 논리 정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너. 고생 많이 했더라. 나도 아빠가 나쁜 사람이었거든"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지만, 그냥 이런저런 생각은 접어두고 이 친구가 진심으로 나와 함께 슬퍼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덜 외로웠던 걸까?'

이야기가 길었는지 날씨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해가 지는구나."

그러고 이팝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이팝나무 둥치가 열리더니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목이야. 진성왕의 백성이야. 아주 오래전에 나쁜 사람 때문에 여기에 갇혔어."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일단은 내려가야 했다. 사연이 궁금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 집에 갈게."

"다음에 오면 이번엔 내 이야길 해줄게"

산을 걸어 내려왔고 노을을 봤다. 노을은 붉고 부드럽게 경주를 감쌌지만 내 머릿속은 이팝나무꽃처럼 그저 새하얬다. 괴담으로 시작해 공감으로 끝난 이 만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답은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다'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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