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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May 22. 2023

도망자 모녀, 경주로 가다

천 년의 주령구 01

서울 교남동에서 신림동 맨 꼭대기에 있는 난곡동, 그리고 경기도 벽제를 거쳐 경주까지 나와 엄마는 계속 도망쳐왔다. 쉼터를 거쳐 내가 초등학생 때 우리 둘만 겨우 살 정도로 짐을 꾸려 달아나서 얻은 방 두 칸짜리 셋집에 당도하자마자 처음으로 소음과 고통 없이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공원과 노인정 그리고 법화사가 근처에 있던 그곳. 근처에는 산이 있었고 둘은 대충 짐도 다 정리 못하고 잔 다음날 김밥집에서 김밥을 사서 산에 올라가서 먹었다 그렇게 한숨을 쉬며 웃다가 다시 울었다. 그렇게 몇 년을 꿈만 같이 평화롭게 살림을 하나하나 늘려갔다. 70년대에 지어진 낡은 벽돌집, 알루미늄 새시로 된 창이 참 예스러웠지만 해가 잘 들어왔고 거기서 우리는 다친 몸과 맘을 치유하면서 계속 여기서 살다가 내가 어른이 되고 더 튼튼해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했었다. 집과 닿은 공원을 통해 뒷산으로 올라가면 큰 이팝나무가 있는 공간이 있었다. 수령이 수백 년은 되어 보였다.  나는 그 나무에 기대서 책을 보고 그동안 내가 태어난 집에서 겪은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엄마에게 나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항상 엄마를 걱정하면서 사는 어린 딸은 자기는 엄마를 걱정해도 엄마는 자기 때문에 걱정하게 되는 걸 원치 않게 된다.

원래는 내 동생이 있을 뻔했다고 했다. 아빠가 임신 6개월의 엄마를 방에 가둬놓고 각목으로 때리지만 않았어도 아마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있었을 것이었다. 뭐 그런 식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안 난단다. 엄마와 결혼 전까지는 뭔가 급히 결혼시키려는 느낌이 있었고 그저 얌전했었던 한 남자. 그러나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가끔 벌어오는 몇 푼의 돈도 오로지 자기의 도박과 술값, 유흥에만 썼다.

어디에서 스트레스를 받기만 하면 혹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콜센터 직원으로 일 생계를 꾸리는 엄마를 때리고 모욕했던 그 사람. 자기가 다른 술집여자들과 놀아며 엄마에게 딴 놈이랑 붙어먹으러 그러냐고 뒤집어 씌우며 때리고 고통을 줬던 그 사람. 그래 그 사람이 내 친부였고 내 동생을 죽인 사람이었다. 그냥 습관처럼 모든 일이 벌어졌다. 가끔은 상을 엎었다. 생계부양은 아내에게 집안일은 아내와 딸에게 떠넘겼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당연한 갑질이라 생각했단걸까? 그 상에 있던 뚝배기가 내 팔에 엎어져 화상을 입기도 했고 뭐. 비일비재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죽어도 못하는 아예 미안하다고 느끼지도 않는 그 사람에게서 엄마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 궁리만 하면서 살았다.

다행히도 도망칠 기회가 주어졌다. 어느 해 어느 날에 내 눈앞에서 아빠가 술병을 깨서 엄마를 찌르려 했고, 나는 그 가운데를 막아섰다. 다행히도 이웃이 경찰을 불러주었고 나는 유리병에 크게 찔리진 않았지만 좀 베어서 등을 몇 바늘 꿰매야 했다. 통원치료를 받으며 여러 사람의 도움과 상담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않아 법원은 아빠와 우리가 물리적으로 분리할 기회를 줬다.

아빠가 구치소에 간 동안 우리는 짐을 챙겼다. 난 평소에 내 행동이 굼뜨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만큼은 엄마만큼 빠릿빠릿하구나 그리고 나도 100미터를 17초에 뛸 수 있구나 등등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등의 상처는 나아갔고 쉼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숨이란걸 돌려봤다. 그렇게 그 쉼터를 거쳐 그 이팝나무가 있는 신림동 꼭대기집에 이르기까지 두렵고 걱정은 되었지만 지독하게 무섭고 아픈 순간이 아닌 순간을 누려봤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 놓을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밤 중에 골목에서 어떤 남자가 소리를 지르는 걸 봤고 그게 아빠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식이다. 어떻게든 찾아내는 거. 궁금했다. 찾아내봤자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돈을 줄 수도 없고 더는 스트레스받이를 해줄 생각도 없는데. 어차피 우리와 있어봐야 당신은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랑 놀아날 거고, 내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신경도 안 쓸 거면서 왜 곁에 두려 하는지? 물어봐야 답을 안 할 것을 알았다.

모든 불을 끄고, 도움 주신 분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벽제를 거쳐 여기로 왔다. 경주로.

나이가 들고 나도 믿을 만한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소개해준 특수학급 담임인 신한나 선생님. 그분이 '등, 초본 교부열람 제한'하게 해 주겠다고 여러 가지로 도와줬다. 우리 담임 선생님도 아니면서 그랬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 사람은 아픈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항상 그랬다고 한다.

이사를 할 때마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밤마다 찾아왔던 그 그림자, 때론 소음으로 때론 존재만으로 소름 돋게 했던 내 생물학적 친부가 미친 짓을 덜 하도록 할 수 있는 조치를 제대로 알고 대처하기엔 우리는 사느라 아니 그저 살아남느라 그저 바빴다. 그 때마다 신 선생님은 아빠가 우리를 찾아내고 접근하려 할때마다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고, 염치없지만 그렇게 했다. 신 선생님은 평소에는 정말 소박하게 하고 다녀서 아무도 눈치 못챘지만 성실한 부모님이 마련해 두신 집이 몇 개가 있었다.  신 선생님은 우리 모녀의 사정을 듣더니 지금은 주말에만 부모님이 쓰시는 서울 모처의 아파트를 기꺼이 내어주었다. 선생님의 부모님도 선생님과 비슷한 분이셔서 주말에 편히 지내던 그 곳을 기꺼이 내주시겠다고 하셔서. 정말 얼떨떨했다. 그 곳은 그렇게 우리모녀의 방공호가 되어주었다. 또, 신 선생님은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웹툰작가인 최 선생님을 소개했다. 참 시원시원하고 재미있는 분이라 자주 우리를 데리고 공연도 데리고 가는 등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정말이지 그런 사람들은 처음 봤다. 아빠같은 사람들 아빠와 비슷한 어른들만 존재하지 않는구나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때 나도 맘이 아팠다. 어린 나도 그렇거니와 엄마는 어땠을까? 그저 맘과 몸이 다친 자신을 돌보는 것 이외에도 자기의 유일한 피붙이를 지켜야 했다. 엄마는 외조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더 외로워했었다. 남동생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매보다는 남매는 결혼하면 한 다리 건너라 이 답답하고 슬픈 이야기를 해도 뭘 어떻게 해줄 순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가 외삼촌에게 전화했다. 그동안 엄마가 말 못 한 게 있다고 누나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 줄 아시냐고. 계속 대답이 없어 왜 그런가 했더니 울고 있었다. 엄마를 정말 좋아했던 외숙모는 전화기 밖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외삼촌의 지인의 도움으로 경주에 일자리와 집을 얻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빠가 죽어라 붙어있는 수도권과 멀어지고 그 '제한조치'를 해놔서 조금 더 마음이 놓이는 편이었다.

아빠라는 사람이 엄마를 엉망으로 만든 거지 세상에 엄마가 버림받은 건 아니었구나. 그리고 나도 그랬구나. 친한 친구들 특히 윤 선생님과 작별을 하고 낯선 곳으로 왔다.



외동의 작고 조용한 임대아파트. 외숙모가 포장이사를 불러줬다. 신기했다. 처음으로 포장이사를 해봐서 좀 얼떨떨해하며 집 근처 커피체인점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시키면서 기다렸다. 사실 아빠에게 추격당하기 전에도 이사를 몇 번 했었는데, 엄마는 돈 한 푼이라도 아껴본다고 거의 포장 정리를 손수 하느라 손이 퉁퉁 부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아빠는 우리가 모를 다른 곳에 있어서 이사 후에 자기가 원하는 물건이 원하는 곳에 바로 있지 않으면 바로 쌍욕과 손찌검이 날아온 기억이 있었다. 그렇게 이사는 고단하고 힘들고 후유증이 큰 일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이삿짐 트럭이 물러나고 처음 그 집에 들어간 뒤에 사람들에게 잔금을 치르고 둘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여기에서는 안전하고 무사하길'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엄마가 휴일을 맞았고 엄마와 함께 마석산에 올랐다. 경주하면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이들과 체험학습으로 왔던 경주 남산 밖에 몰랐는데, 경주에 이런 산이 있는지 몰랐다. 뭔가 포근했다. 곳곳에 특이한 바위들이 많았고, 경주답게 부조로 새겨진 불상등이 있었다. 엄마는 나와 등산오기 전날 인터넷으로 뭔가 계속 찾아보면서 나름 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용문사에도 같이 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빠와 비슷한 실루엣과 외모의 등산객을 보며 둘 다 새파랗게 질리기도 했다. 결국 다시 보니 아니었고 우린 근처 식당에서 백반을 먹고 내려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발 더는 아니길 바라며 길을 두리번거리는데 오후 햇살이 큰 나무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익숙한 나무. 내가 난곡동에 붙은 그 산 안에서 발견한 '이팝나무'였다.

'잘 모르겠지만 괜찮을 거 같다'

이 문장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가 쉬는 날이면 되도록 햇볕이 비취는 날 그 나무 그늘에 찾아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간식과 음료를 먹고, 난곡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다. 나무 근처가 아니라 나무속에서 누가 걸어나오기 전 까지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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