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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Jun 21. 2023

천 년이 꼭 어제와 같아

천 년의 주령구 03

내가 아마 그 전의 학교, 혹은 전학 온 이 경주의 중학교에 다니는 보통 아이들처럼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시간 그 산에서 목이를 봤을 때 줄행랑을 치고 다시는 오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난 정말 보고 들은 게 많았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매우 낯이 익은, 심지어 아기 때부터 자기와 함께 있었던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와 엄마를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갔었다. 낯익은 사람이 좋은 사람? 그걸 믿기에는 근본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이 선생님은 어땠는가? 그리고 새 학년에 올라가 친해진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희선이라는 친구는 또. 그 친구가 갑자기 방과 후에 자기 집에 나를 초대하고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이 선생님에게 소개했다.

낯이 설었지만 분명 자기를 해할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아 이 낯선 지방에 오기까지 그런 이들이 종종 있었다. 쉼터 선생님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 또래들, 뭐 그 외 등등.

본능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행동하지 않고 뭘 하든 돌아보고 고민하는 사람은 자기를 해치는 쪽은 아니었다. 그랬다. 목이가 그랬다. 옷도 매우 이상하고, 말투도 요즘말투이지만 영 할아버지 같기도 한. 나이는 동갑이거나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이 소년은 정말이지 한 마디 한 마디를 어렵게 꺼냈다.

그렇게 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정해진 시간에 그 이팝나무로 와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목이의 이야기를 말이다.



목이는 그 나무속에서 사람들이 살고 죽는 것 나라가 바뀌고 또 바뀌는 것 때로는 전쟁의 소문이 웅성대는 것, 피신해 온 사람들이 무얼 먹고 이야기를 하고 어떤 옷을 입는지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목이가 나무 바깥에서 평범한 신라 소년으로 살았던 시절 사람들이 수군거렸던 '저 무능한 망할 만왕'이 나중에 '진성왕'을 거쳐 '진성여왕'이라고 불리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자기의 아비라는 자 그리고 그 아비를 이용한 높으신 분이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 이 나라까지 어떻게 파먹어왔는지.

더는 눈물을 흘릴 수도 소리칠 수도 없기에 가슴이 썩어 들어갈 때쯤이었다.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의 팔 할이 지나서였을까? 답답해하며 울부짖던 목이는 달이 유난히도 크고 밝은 밤에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때부터 한 낮부터 해가 지기 전에 잠깐은 나무에서 벗어나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을 관찰하며 살다 보니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전히 나무 안에 있을 때처럼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았지만 일부러 사람처럼 돌아다니며 물도 마셔보고 멱도 감아보고, 가끔은 인가가 있는 동네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지면 갑자기 기운이 빠졌고 어느새 나무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렇게 수 해를 지나 눈앞에 있는 '의주'라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

보통은 오전에 와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직접 나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듣고 있다는 표시는 여러 번 한 것 같았는데,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꽃잎과 나뭇잎을 떨어뜨려주는 일과 드리우는 일은 뭐 바람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비슷했다. 자기를 세상에 낸 친부가 엄마와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는 것. 천 년이 짧은 시간은 아닐 텐데, 그 정도는 충분히 달라지고 좋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대로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럴 때면 가지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지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에 이곳에 머물렀고, 좀 더 여러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목이는 의주가 부러웠다. 의주 옆에는 아직 엄마가 있으니까. 자신의 등장에도 생각보다 겁먹지 않아 주어 고마웠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라고 정확하게는 잘 기억 못 하겠어.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는 말 못 하겠어. 다만. 아직도 마음이 무거워."

"그러니까..."

의주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연표를 체크했다.

"너는 지금 달력으로 891년에 살았었구나"

의주는 891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이에게 보여줬다.

"명확하구나. 지금 세상은. 그런데 우리 이모가 운영하던 '역'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고 먹고 가는 곳에서 가끔 동로마인들이나 아랍상인들이 머물렀었거든. 비슷한 모양의 글자를 본 것 같아. 네가 숫자라고 이야기하는"

"아 그걸 우리는 '호텔'이나 '여관'이라고 해. 그런데 '여관'이 더 입에 붙겠다. 내 이야기는 네가 다 들어줬으니까. 네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것 같아. 해가 지려면 한두 시간은 남았으니까 시간은 충분해."

의주는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수를 내밀었다.

"먹어볼래? 먹을 수 있어?"

목이는 그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이 나무속에서 가끔 소풍이나 등산객들을 지켜보면서 이런 것들을 많이 보긴 했다. 그러나 누구도 목이에게 그 음료수를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

"먹을 수는 있는데 목도 안 마르고 갈증도 안 가셔. 그래도 해볼래"

목이는 의주에게 음료수를 받아 마셨다.

"와... 이거. 시지만 달고 괜찮은데?"

"이야기 값이야. 나 역사공부도 너한테 부탁해야겠다."

잠깐 웃었다.

"나는... 아빠가 엄마를 누구에게 팔아넘겼어.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막 걸음마 뗄 때. 이모가 우는 나를 안고 키우기 시작했어. 원래 엄마와 이모가 같이 여관을 했었거든. 그래서... 난 이모와 살기 시작했어."

의주가 한숨을 쉬었다.

"너네 아빠 욕 해도 되냐?"

"얼마든지. 나도 네가 너네 아빠 욕할 때 나무속에서 같이 욕했거든"

다시 웃었지만 입이 썼다.

"그냥 거기서 고생을 하긴 했어.  이모가 마구간 청소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다 시켰거든"

"이모도 나쁘네"

"아니야. 도련님으로 처음부터 키워버리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묘하게 무시하고 시기 질투하거든. 일은 고되게 시켰지만 밥을 굶긴 적도 찬 데서 자게 한 적도 없었어. 꼭 자기 품에서 자게 하고 조금 커서는 내 독채도 지어줬어. 이모 맘은 그랬던 거야. 아무것도 안 빼앗기는 독한 놈으로 키우겠다고. 언니처럼 그저 순둥이로 자라게 하진 않겠다고 말이야."

"옛날도 참 드라마틱하다. 천년도 더 되었는데 꼭 어제 일어난 일 같으니까"

"가끔은 나도 꼭 어제 일 같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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