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주령구 12
이곳에 와서 많이 안정된 엄마는 이제 일을 하나 더 하기로 했다. 처음엔 말렸다. 나 뭐 더 안 사줘도 되니까 그냥 좀 쉬든지 취미생활을 하라고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고 오히려 외삼촌이 소개해준 일이 가벼워서 다른 일 하나 더해도 충분히 쉬는 것도 된다고. 알고 보니 지연이의 엄마가 가벼운 일 하날 소개해준 거였다.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지연이 어머니가 한 번 우리 엄마와 따로 만났고 그때 지연이 엄마가 하시는 공방의 보조와 정리 일을 맡게 된 것. 엄마가 일머리 좋고 꼼꼼한 걸 그분도 알아보셨나 보다. 그렇게 나와 지연이의 관계는 서로의 엄마에게로 이어졌다. 분명 내가 엄마의 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내 딸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라는 생각. 그렇게 엄마는 안전하게 바빠졌고, 나는 방학도 되었겠다 많은 시간을 목이의 이야기를 듣는 데 보내게 되었다.
목이는 누구라도 절대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을 겪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것이 참 끔찍했고 처음 지연이가 그걸 듣고는 나보다 더 크게 통곡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내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 우리 아빠보다 나쁜 인간은 없어 보였지만 목이의 아빠는 상상이상이었다. 생각했다 알코올에 중독되고 도박에 중독된 것보다 더 강한 것에 목말라 있다면 도대체 그게 뭘까? 목이가 대답했다.
"보란듯이었어"
"그래서 한 게 보란 듯이 자기 아내를 죽게 만들고 아들을 팔아넘긴 거?"
"그냥 우리는 그 보란듯이를 위한 도구였을 뿐이고... 엄마와 월성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때 아빠. 아니 아빠라고 부르기 싫다. 그냥 돈염 이라고 할게. 돈염에 대해 처음으로 상세하게 풀기 시작했어. 아마 그전엔 너무 어릴 때라 말해도 몰랐을 거고 이모를 통해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하는 것과는 달라졌으니 더했어 생생한 게."
목이는 이 시간으로 와서 유일하게 나와 이야기하며 지냈다. 그러다 보니 말투도 닮아갔다. 머리가 좋은 편이라 이젠 한글도 줄줄 읽고 쓴다. 글씨도 주로 내 글씨로 필담을 하다 보니 글씨도 비슷해졌다. 영어도 일부는 읽는다. 한자는 뭐 나보다 더 훌륭하게 잘하고. 신라시절에 배운 다양한 언어들도 잘하고. 가끔 내게 이런 친구가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지연이네도 데려가고 우리 학교도 구경시켜주고 싶고 집에도 데려오고 싶은데 그 이팝나무 주변 몇 미터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뭘 먹길 하는데 그냥 그게 사라지는 것 같고. 매일 세수를 하고 옷을 빨고 나온 것처럼 그대로다.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나무속으로 사라진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떠드는 동네 친구처럼 되었어도 그런 점이 목이가 이곳 이 시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목이가 내가 모르는 시절을 이야기해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 지경까지 되었으니 굳이 뭘 꾸며낼 정도로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잘 보여 그 모든 '저주'같은 것에서 풀려날 리도 없고 말이다.
"그렇게 월성에 끌려와서 심한 일들을 당한 뒤 어느 날 보니 엄마가 월지 중 구석 연못가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된 거야. 돈염은 정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대신 자기 말을 안 들었으니 저 꼴 났다 하고 하며 비웃었지. 나는 그 자기 말이 뭔지 대충 알 거 같았어. 안 그래도 엄마와 나만의 방법으로 대화하며 그 사람이 원하고 해 왔던 일이 뭔지 말해왔었거든. 그리고 엄마는 스스로 죽지 않았어. 돈염이 죽인 거지."
목이가 갑자기 목이 메었는지 말을 멈췄다. 이해할 만했다. 나도 그 어릴 적 일의 일부를 상담사 선생님에게 꺼내기까지 두 주정도는 그냥 그 앞에서 입을 다물고 울기만 했으니까. 나보다 이 친구가 강단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맘이 아팠다.
"결국 엄마가 알아낸 건 같은 발해 유민도 아니었고 백제의 방계 귀족출신도 아니었고 대가야 후손이었다는 거. 엄마를 만나기도 훨씬 전 그러니까 그 인간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때 가야 중 하나인 탁기탄에 있었대 가야가 복속되면서 왜로 도망치듯 건너갔고, 그렇게 왜에서 누굴 만나고 사람을 낳고 낳아 돈염이란 사람이 나온 거. 힘에서 밀려 그리되었다고 생각하니, 왜에서 어떻게든 귀신이든 혼령이든 신과 연결된 여자들은 다 집안사람으로 끌어들였대. 그렇게 찬란했던 나라가 밀린 건 바로 힘을 제대로 발견 못하고 이용 못해서라고 생각했거든.
그 인간은 나에게도 그 말을 했어 '언젠가는 모든 것을 무너뜨린 신라와 그 후손들을 씹어먹어 버릴 것이다. 그들을 발밑의 티끌로 삼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대대로 내려진 그 말을 외우면서 잠이 들었대. 그 집안은 백제가 왜와 교류할 때 그때 통역을 해주면서 재산을 쌓았고 무역도 했었나 봐. 엄마에게 가르쳐준 역도 대대로 하면서.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 보고 등치는 법도 배우고. 돈염의 아버지와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여자들을 집에 들이고 이용하고 제물로 바친 다음에 세력이 더 커졌다고 하더라고 결국 왜의 대부분을 다스렸던 백제계가 멸망해 본격적으로 왜를 통치할 때 백제 쪽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바치고 한 자리를 얻었고. 돈염에게는 수많은 죽책과 그림들이 있어. 거기엔 가난과 비참을 극복하는 방책들이 잔뜩 담겨있어. 어느 날 돈염이 나를 방에 들이고 잔뜩 사람들에게 괴롭힘 당하게 한 뒤. 사람들을 다 물렸어. 이상한 약을 먹이지도 않고 오랜만에 날 치료할 사람을 불러주더라. 치료받는 동안 엄마 생각이 났어. 그래서 더 울고 싶었어. 그 사람 앞에서는 엄마와 말을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치료를 마치고 그 죽책들을 다 설명해 주는 거야. 내용과 시간 사건은 달라도 다 똑같았어. 누군가의 피와 비명이 필요했고 그게 강할수록 피를 좋아하는 신이 대답을 한다고. 신이든 영이든 상관없이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다고 말이라고.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길 그 사람 목소리로 들었는데 자기도 나보다 조금 더 어린 나이에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그러나 엄마가 우리 엄마처럼 이상한 것을 믿지도 않고 반항적이지 않아서 곱게 겪었다고 하더라. 잘 꺾어져서 자기는 두어 번으로 끝났다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나에겐 할머니일 수 있는 그 사람이 비정상 아닐까?"
"누가 봐도 비정상. 아니면 조금 더 깊이 빨리 절망했거나. 너의 어머니처럼 똑똑하지 않았던가"
"지금 봐도 누가 그렇게 이상하게 방을 해놨는지 모르겠는데 빛도 잘 안 들어오는데 그냥 금칠과 울긋불긋 칠을 해서 화려하기만 하고 정신없는 그림들이 붙어있었어. 어떤 그림은 토악질이 날 정도로 보면 기분이 이상했어. 그 그림 중 하나를 보여주더라. 누가 봐도 왜의 풍경이고 사람 하나를 수많은 귀신같은 것들이 둘러싸고 있었어.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이 깔고 앉은 언덕에 수많은 사람들의 토막 난 시신이 있더라고 그 토막 난 시신 위에 자리를 깔고 무릎을 꿇고 뭔가를 마시고 있었어. 돈염은 자기가 했던 일이라고 하더라고. 눈 한 번 감고 하면 지금의 모든 고통이 사라질 거고 너의 엄마처럼 죽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눈 한 번 감고 뭘 하는데?"
"돈염과 함께 각간이 좋아하는 어린애들을 잡아다 각간에게 바치고 그다음 날 그 애들을 내가 직접 죽인 다음 돈염이 섬기는 그 바다건너에서 온 귀신에게 제를 드리래 가장 어리고 예쁜 아이의 목을 그어 죽이고 피를 마시라고. 너네 엄마가 그걸 안 한다고 버텨서 나름 기다려줬는데. 그날밤 자기가 섬기는 신이 그러더래 그걸 거부한 그 년은 그 아이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죽이라고. 그렇게 엄마는 월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거고"
말이 안 나왔다. 그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아직도 가난할 뿐인 왜에서 나름 부자 축에 속하게 되었고 이 나라에 와서 각간에게 대사라 칭함 받고 화려하게 잘 지내지 않나? 뭐가 모자라서 그러지?
"난 그 사람의 욕심이 너무 과한 거 같다고 생각해."
"그 사람에겐 아마 그 말 안 통할 거야. 평생이 목마른 인간이니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자기 이후에 올 새로운 생명을 싹 다 바쳐서라도 자기 눈앞에 있는 신라의 꼭대기에 서지 않으면 또 꼭대기에 서서 신라의 심장부터 파먹지 않으면 만족 못하니까. 사람들은 돈염을 두려워했지만 미워하고 존경하지 않았어. 다 자기가 한 짓 때문인데 그럴수록 돈염은 어떤 힘을 빌어서든 자기 혈육을 팔아서든 그렇게 하려고 했지. 나는 그게 그 사람이 특별하게 타고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사람도 그렇게 배우고 겪어왔던 거고, 중요한 순간에 그런 선택을 한 거야. 엄마가 알려주더라. 그나마 엄마와 그 사람이 사이가 좋고 나를 가질 즈음되었을 때 자기가 죄를 지은게 있다고 자기가 혼자 좋아했던 이웃집 아이를 백제계귀족에게 그렇게 바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울더래. 엄마도 돈염과 살면서 고민이 많았는데 이런 일까지 나에게 말한 사람이고 새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내가 뭘 도우면 같이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착각한 거지. 그런데 절반만 진실을 말한 거였어.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어. 귀족은 너의 뒤를 받쳐줄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과 더 예쁜 여자들을 약속했거든. 물론 더 많은 재물도 말이야. 일단 엄마가 가진 특별한 뭔가가 필요했으니까. 항상 그런 식이야 절반은 진실, 절반은 거짓. 온전한 거짓보다 나빠."
[이제부터 2부가 시작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