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치료사가 바라보는 색채심리학
2017년 어느 날, 나는 TV에서 우연히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의 특강쇼를 보게 되었다. 한국인이 가진 의식 특성과 한국 사회를 주제로 여러 회차에 걸쳐 방영하는 심리학 특강쇼였는데, 다소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재치 있는 입담과 능숙한 강의 진행으로 방청객의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나 역시도 방청객중의 한 명이 된 듯 강연을 끝까지 시청했었는데, 여러번 터져나온 웃음은 우리모두가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공감’ 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는 일치감치 미대를 목표로 입시미술학원에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나무로 만든 무거운 화구박스 안에 가지런히 들어있던 물감의 색 이름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러 ‘모브(mauve)’ 라 불리우던 예쁜 보라색이 왜 모브가 되었는지, 빨강과 비슷한데도 왜 ‘카민(carmine)’ 뒤에는 따로 레드가 붙지 않는지 색채심리학 공부를 하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색채심리를 공부하게 된 계기도 마흔이 넘어 시작한 미술치료 대학원 과정에서였으니, 물감을 멀리하고 지내던 나는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이렇게 다시 물감과 색을 만지는 직업을 가지게 된 셈이다.
내담자의 그림 안에서 색채가 보여주는 심상적 단서는 치료사로서 꼭 인식 해야할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색채의 의미와 상징에 관한 이론은 모두 서양에서 시작된 학문을 근간으로 한다.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분명 많은 것을 놓칠 위험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문화가 가지는 큰 차이점이 있다. 한국인의 독특한 특성이 서양사람들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굳이 심리학 교수의 TV 특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동서양인의 뇌 검사연구에 따르면, 중국 사람들은 나와 엄마를 구분 짓지 않는데, 미국인은 뇌에서 조차도 나와 엄마를 구분 짓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화와 역사와 그 저변의 집단무의식조차 다른 우리 동양인이, 인간의 심리를 다룬, 드 중에서도 색채심리학을 서양이론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백의민족(白衣民族)’ 이라는 우리 국민에게 붙여진 별명 아닌 별명은 무명으로 짠 한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생활하던 그 시대에, 선교를 위해 내국 했던 각 나라의 선교사들이 마치 모두 잠옷을 입고 돌아다닌다고 느껴 매우 기이하게 여긴 것에도 드러나듯 하얀색의 의복을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시광선을 바라보는 시각 능력은 인종이나 국가에 차이가 없지만, 그 색을 느끼고 색채어휘로 분류하는 것은 언어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술치료를 공부하면서 색채심리에 더 심취하게 되고, 내담자를 만나면서 그림 안에서 표현되는 색채의 상징을 분석하기 위해 고민할 때마다 늘 이러한 부분은 내게 답답함을 안겨 주었다. 사실상 치료사가 아니라면 굳이 색채의 의미와 상징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각 분야의 산업마케터들 역시 색채에서 비롯된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한 수 많은 성공사례에 의존해서 파악해도 되고, 이미 세상에는 많은 색채심리 관련 서적들이 존재하며, 인터넷을 통해 지구 반대편 소비자의 심리조차도 손가락 하나로 검색할 수 있으니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다만, 정서적으로 고통받는 내담자를 현장에서 바로 만나는 미술치료사들은 그림에 토해낸 내담자의 고통을 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기에 엉뚱한 해석은 자칫 치료의 목표와 과정을 왜곡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이러한 나의 작은 의문과 그에 대한 고민과 실험의 결과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