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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메 Dec 01. 2022

첫 번째 수업 : 감응할 용기

감응에 관하여



"괜찮아. 너 원래 둔한 거 알고 있었어."



둔하다고? 내가? 저녁 산책마다 발라드 들으며 눈물 훔치는 내가 원래 둔한 사람이라니.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자 친구에게 이 말을 듣고 나니 쿨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황당하고 또 미안했다.



언제부터 둔해질 걸까 가만히 생각해 봤다. 무딘 사람인척 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어도 괜찮은 척, 친한 친구가 생일 축하 메시지를 안 보내도 신경 안 쓰는 척하는 나의 모습. 너무 예민해서 아닌척하던 게 습관이 되어 이제 정말 둔한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예민과 무딤 사이에 옳고 그름이 있겠냐마는 나는 되도록 예민한 사람이고 싶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 후로 더욱 그랬다. 그래서 글쓰기 수업을 신청했다. 아둔해진 감각을 깨우기 위해.





글쓰기 원칙 1.
사실보다 반응과 감정이 중요하다.



갑작스러운 비가 쏟아지는 날, 첫 수업부터 지각이다. 점퍼가 걸쳐진 자리에 앉아도 되냐며 조용히 묻고 앉는다. 세로로 긴 공간. 어느 쪽 상석이 선생님인지 몰라 고개만 두리번거렸다. 숨 막히게 조용하다. 어색한 시끄러움보단 침묵이 낫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이 모였는지 다들 사람 좋은 미소는 짓지만 누구도 먼저 말은 하지 않는다.



나를 따라 지각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꽉 찬 자리와 함께 수업은 시작됐다. 오른쪽 상석이 선생님이다. 역시 첫마디부터 글쓰기 정수를 알려주신다. 짧게 써라, 하나 마나 한 이야기하지 말아라, 같은 단어 쓰지 말아라... 지식으론 알고 있지만 체득하지 못한 조언들이 쏟아진다. 그중 유독 마음에 걸리는 조언이 있다.



"면밀하게 관철해서 나만의 반응 감정을 적어내세요."





내 감정은 유독 속도가 느리고 벅찼다. 7년 전 처음 이별하는 순간에 슬프지 않았던 반면, 그 여운은 아직도 지독하게 남아있다.



보편적이지 않은 감정 온도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건 고되다. 쉽게 드러내면 분위기 싸해지기 십상이라 감정 수도꼭지를 조절하는 방법을 추가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날은 그저 잠그고 사는 게 편하다. 그렇게 나는 수도꼭지를 왼쪽으로만 돌리다 마침내 무딘 사람이 되었나 보다.



여기 유난스러운 사람들이 모여있다. 선생님은 우리가 글을 쓰기 위해 모인 자체가 숭고하다고 했다. 월 1,000만 원 버는 법 배우느라 바쁜 세상에 글쓰기 모임이라니. 그것도 팔리는 글이 아닌 감정을 파헤치는 글을 말이다. 그래 여기라면 코인 노래방에서 혼자 훔쳐내던 눈물의 의미를 파헤쳐 봐도 괜찮을 수 있다. 용기와 함께 고양 상태에 이른다.



첫 수업을 마치고 다음 시간 숙제를 바로 시작한다. 글에 감정을 실어본다. 무딘 껍질을 벗겨낸 마음의 속살은 너무나 유치하고, 감정적이고, 오지랖스럽다. 한 겹만 벗겨냈을 뿐인데 벌써 속옷만 입고 남들 앞에 선 기분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모습까지 나올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들여다봐도 된다는 용기가 필요했던 거 아닐까. 거대한 담론이 여기저기 놓인 시대에 하찮은 나의 감정을 돌봐도 된다고. 억누르던 나의 감정을 다 돌보고 나면 그땐 다음 사람 감정으로 들어가 봐도 된다고.



선생님의 북돋움 효과는 대단하다. 아무리 결심해도 써지지 않던 글이 술술 써지는 거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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