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정산, 2020년 4월의 기록
매일 하늘이 너무 청량해서 컨디션이 좋았지만, 이상하게도 외롭다고 많이 생각했던 4월이었다. 심적으로 리프레시가 너무 간절했던 나의 봄은 별 일 없이 잔잔하게 지나갔다. 주에 세 네번씩 청계천을 산책하면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모두 보았다. 집 앞의 가로수에 하루가 다르게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 보일 정도로, 빅이벤트 없이 그저 시간이 흘러갔던 4월이지만 그래도 몇 가지를 꼽아 기억해본다.
이달의 음악 nokdu-오늘같은밤
지난달부터 시티팝에 빠져 살고 있다. 어두운 도심 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는것 같은 음색이 괜시리 내 기분까지 찬란하게 만든다. 뭔가 저녁에만 들어야할것 같은 이 노래를 이번 달 야근할때 무한재생했었다. 4월의 기획서는 nokdu와 함께 만들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님.
이달의 책 외롭지 않을 권리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를 읽으며 생활동반자법을 처음 알게됬던 것 같다. 내 인생에 결혼은 아마 없지 싶어서 생활동반자라는 개념에 대해 굉장히 신선하고도 인상깊었는데, 마침 관련 책이 출시되어 바로 구매해서 읽어보았다. 가족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한국사회의 가족사랑은 너무 지독해서, 책임과 의무를 덜고 대신 그 자리에 같이 사는 즐거움을 채울 필요가 있다는 말에 밑줄을 두번 그었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노션에 따로 아카이빙해둘 정도로 간만에 흥미돋았던 책이었다.
평등한 개인끼리, 불안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즐겁게 살아갈 것인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 살면 행복해진다' 는 낭만을 때때로 실은 꽤 자주 배신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행복의 모델을 갖는 것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즐겁고 행복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는 사람들이 지루한 노동을 버티고 구차한 현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로부터 서로에 대한 예의와 윤리가 나오고, 성실한 노동이 나오며 사회에 대한 애정이 나온다.
- 외롭지 않을 권리, 황두영
생활동반자법은 우리 각자가 모두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그 행복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법안이 제정되는 날이 언젠가는 꼭 오길.
이달의 넷플릭스 없음
넷플릭스 볼 거 없다병에 빠졌다. 진심 요즘 볼 거 없음.
이달의 소비 쌀국수
두번째 비건위크를 실천했다. 첫번째 비건위크때는 너무 배고파서 좀 괴롭게 보낸 것 같아, 두번째는 만발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건 팟타이와 비건 마라샹궈를 위해 쌀국수를 샀다. 밥보다 부담스럽지 않고 생각보다 활용법이 다양해서 7일 중 4일이나 해먹었다. 게다가 가성비도 넘쳐서 아주 만족스럽다.
이달의 음식 캠핑장 삼겹살과 라면
4월 15일 총선날 사전투표를 하고 난지캠핑장에 갔다. 간만에 쐔 콧바람이라 너무 행복했는데, 삼겹살과 라면이 너무 꿀맛이라 거의 울 뻔했다. 라면 먹으러 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숯불의 힘은 대단하다. 그리고 모닥불도. 해가 저물쯔음에 장작을 쌓아놓고 태우며 네 명이 말없이 불멍을 때렸다. 타닥타닥 나무타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면 싶었고, 다들 입을 다문 채 각자의 힐링타임을 보냈다.
집에서 요리하는 빈도가 줄고 있다. 휘뚜루 마뚜루 해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슬슬 귀찮아진다. 4월에 야근이 부쩍 잦아서 그런지, 퇴근후 저녁메뉴를 고민하고 요리하고 먹고 설거지할 만큼의 에너지가 없다. 라면과 외식을 사랑한 4월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 아침은 항상 챙겨먹고 있다. 토요일 아침에 뭘 먹을지 고민하는게 요즘의 낙이다. 원래 아침밥 챙겨먹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생활패턴이 조금 변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주말이면 12시까지 자던 버릇이 없어졌기 때문. 회사생활 4년차가 되니 드디어 바이오리듬이 변한 건지, 주말에도 출근시간과 비슷하게 눈이 떠져 오전을 알차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눈을 뜨면 요가소년으로 스트레칭을 한번 하고, 청소와 빨래를 돌린 후, 조식과 커피를 챙겨먹는 모닝루틴이 생겼다.
아침식사라고 해봤자 토스트나 샌드위치 정도라 뭐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챙겨먹으며 시작하는 하루는 기분이 정말 좋다. 아주 성실하게 나를 돌봐주는 느낌이랄까. 안하던 짓을 해서 그런 것 같다. 집에서는 엄마가 아침밥 줘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먹이려고 아침부터 부엌에서 뚝딱이고 있다. 꽤 낯선 일인 만큼, 마음을 쓰고 있는 기분이다.
여행 가서 호텔에 묵게 되면 꼭 조식을 챙겨먹었었다. 피곤해죽겠는 와중에도 조식시간을 맞추겠다고, 눈꼽만 뗀채 슬리퍼 끌고 나갔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뭐 대단한 요리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도 조식을 사수했던 이유는, 조식을 먹고나면 여행 온 기분이 물씬 들어서였다.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아침식사라서, 루틴을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한번 더 프레시해지는 기분이랄까. 여행의 목적이 그렇듯, 안하던 짓을 할 때 느껴지는 의외의 기분전환이 있다. 4월 꼬박 챙겨먹었던 주말의 아침식사들도 그러했다. 이제는 새로운 루틴으로 잡혀져 조만간 이 또한 시시콜콜해지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지만, 외로움 가득했던 4월의 나날들 중 가장 충만한 순간이었던 아침식사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
이번달 부쩍 외롭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쉬는 날 약속이 없어 집에만 있을 때, 하필이면 눈도 일찍 떠져서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날, 세번의 끼니를 차리고 치우면서 혼자 밥을 먹고 있자니 외롭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밥 먹으면서 보는 넷플릭스나 유튜브도 이제 조금 지겨워졌다. 그냥 습관처럼 티비를 켜듯이 영상을 재생해놓고는 보지도 듣지도 않는 일이 많아졌다. 그저 사운드 채우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또 한번 외롭네 라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왔다.
집을 나와 혼자 살아보겠다고 했던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나는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때문이었다. 내 인생에서 결혼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정말 결혼하지 않고 싱글로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물론 결혼 이외의 선택지가 독신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잘 맞는 누군가와 생활동반자로 살아갈 수도 있고, 원가족과 계속 함께하는 선택지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결혼은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는 점에서 인생에 견고한 울타리를 치는 일과 같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울타리 안에서는 두려울게 없다는 안정감과 따뜻함 같은것. 이 또한 결혼이 인간의 고독을 방어해주지는 않는다는 경우의 수가 있지만... 아무튼 그런 울타리를 치지 않고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직접 나와서 혼자력을 길러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드는 생각은 혼자 사는 것은 어찌되었든 외롭다는 것, 일상 속에서 온기를 채울수는 있지만 그것은 함께 사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평생 혼자 살지는 못할것 같다는 것이다. 여전히 결혼이라는 제도가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생 혼자 살 일은 못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이랑 혹은 원가족이랑 따뜻한 시간을 보내도, 집에서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저녁메뉴를 함께 고민하고 같이 밥을 먹는 일에서 오는 온기는 또 다르다. 생활동반자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가족이 되었든,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모른채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사회에 1인 가구가 이토록 많다는데,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만 외로운 건가 싶다.
가족이 보고싶은 4월이었다. 5월에는 집에 조금 더 자주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