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의 기록
11월의 절반을 제주도에서 보냈다. 아무 생각도 계획도 부담도 없이 보냈던 보름 간의 시간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내 생에 가장 무탈한 기간이었던 제주도에서의 기억, 그래서인지 정신이 없는 요즈음 잠자리에 들기전마다 자꾸 사진 앨범을 꺼내본다. 서울에 오고난 뒤 거의 매일 사진첩을 한번씩 보는 데, 그 기분이 마치 상자에서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먹는 느낌이다. 지나간 추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행복했던 순간을 담은 사진을 꺼내보는것 만한 만병통치약은 없는 것 같다.
제주도에 온 첫째날, 일몰을 보기 위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필름 카메라를 들고 해안산책로로 부리나케 나갔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그리고 겸둥이 호두랑 함께 산책을 나가서 보았던 이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태어나서 본 하늘 중 가장 붉고 따뜻했던 일몰의 순간을 카메라로 담아보려 이리저리 찰칵대다가, 눈에 담는 것만 못하는 것 같아서 멍하니 앉아 해가 질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아 너무 예쁘다 라는 감탄만 내뱉는데, 문득 이 순간이 참 무탈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어떤 일들이나 걱정따위 없이, 백지 위에 오감으로 느끼는 감정과 감탄사만 그릴 수 있다는 것, 이 무탈함이라는 감정이 꽤나 생소해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주도에 숨겨진 숲들을 탐방했던 날이다. 아직 명소로 알려지지는 않아서 이름도 없지만, 그만큼 자연의 냄새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들. 프로그램이 너무 아침 일찍 시작해서 신청할까 말까 망설였었는데 안했으면 큰일날뻔 했다. 아침 공기 섞인 숲내음을 맡으며 산책을 하는데, 사방을 둘러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도 온통 초록세상이고, 아무 소음도 없이 그저 새소리와 내 발자국 소리만 바스락거렸다. 문득 내가 지구인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제주도의 초록초록한 물결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용눈이 오름 야간 트래킹 프로그램을 신청한 날이었다. 이 날도 하늘이 아주 맑아서 해가 지는 풍경이 어찌나 멋지던지. 정상에 오른 뒤 이렇게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해가 지는 모습, 그리고 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저 바람소리와 음악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달이 뜨기 전이라 눈 앞은 불빛하나 없이 깜깜한데 그 와중에 별이 쏟아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청승맞게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 왜 눈물이 났는지는 말로 설명은 못하겠다. 그저 내가 보고있는 시야가 너무 넓고 아름다운데 이 곳은 어디 머나먼 외국도 아니고 1시간이면 올 수 있는 제주도의 수많은 오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이렇게 멋진 광경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또 보러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무적의 만병통치약을 얻은 기분이랄까. 갑자기 내가 한국에 발딛고 있는게 아늑하고 감사해지는 기분이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회사로 첫 출근을 했다. 출근이라기에는 침대에서 딱 4발자국 떨어진 테이블로 직행한 거라 사실 아직도 붕 뜬 기분이긴 하다. 이직을 한건지 만건지. 출근한지 2주가 다되어 가는데 아직 사무실을 한번도 못가봐서 참 애매한데, 이와중에 업무도 조직문화도 너무도 달라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조바심이 가득하다.
어떻게... 일을 배웠더라?
기반 지식이 없는 분야로 새롭게 시작을 하는 터라, 처음부터 공부를 해야함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진땀이 주륵주륵 흐른다. 사용하는 업무 툴들도 너무 낯설고 프로세스나 업무용어들도 하나도 모르겠고, 그 와중에 외국어들이 난무하니 정신 나갈 것 같다. 정말 말그대로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다.
분명 이전 회사에서도 제로에서부터 시작했을 텐데, 도저히 어떻게 일을 배웠었는지 모르겠다. 일을 배운다는게 무엇인지 어떻게 익혀나가는 건지, 머릿속에 물음표만 하루종일 떠다니던 첫 일주일간의 멘붕을 잊을 수 없다. 첫 출근을 한 날 친구들한테 나 어떡하냐 만 무한 반복하며 한숨 대파티를 벌였다. 다들 시간이 해결해준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걱정말아라, 하루 출근하고 뭐 벌써부터 난리냐며 위로해주었지만 솔직히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친구들아 미안)
모든 경력직들이 그렇겠지만, 빨리 적응해서 밥값을 해야할텐데 라는 압박감이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이런 부담감에 비하여,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 넥스트 스텝을 잘 모르겠어서 막막 그 자체이다. 오피스 출근이라도 하면 나을 것 같은데, 그저 집에 쳐박혀서 이 팀의 하루 사이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채 있자니 너무 답답하다.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너무 몰라서 무엇을 질문해야할지도 모르겠는 기분. 대학생때 문과생인 주제에 수리통계학을 공부해보겠다며 (당당한 패기로) 자연대에 가서 기초수업을 듣고 대멘붕이왔던 때가 떠올랐다. 철회할 수도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한 한기를 버텼는데, 지금 딱 그 기분이다. 이거 빼도박도 못하는데 어떡하지...
온보딩 과정 동안 배우는 것들, 기록되어있는 문서들을 계속 찾아보며 공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그대로 머릿속에 인풋만 계속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지식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기만 하는 기분, 이 베이스를 활용해서 내가 아웃풋을 낼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은 여전히 ing다.
어떻게 일을 배웠었는지 어떻게 기획을 했었는지도 까먹은 기분을 여전히 지울 수 없지만, 친구의 말대로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나도 하겠지 뭐- 라는 배짱으로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3개월 수습기간을 무사히 통과할지도 걱정인데, 뭐.. 짤리면 다른 일 하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한번 더 정신무장을 해본다.... 하...!
헉 약간 짜릿한데?
두려움과 막막함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웃기게도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짜릿함을 느끼기도 한다. 배움의 즐거움이랄까, 생소한 분야를 헤쳐나가면서 전혀 모르던 것들을 알게되니 너무 재밌다.
퇴사를 결심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스스로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수 없고 왠지 이 상태가 쭉 지속될 것 같아서 나온 것인데, 그 니즈를 정확히 해결해나가고 있는 기분이다. 모르는것이 100 이었다가 99, 98로 줄여나가는 과정의 즐거움 덕에 계속 공부를 해나가는 맛이 있다. 미팅에 참관해서 조금씩 알아듣는 말이 생길때마다 뿌듯함과 약간의 자신감도 덤으로 얻게 된다. 그래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 뭐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다들 천재만재일까! 하면 되겠지!
하지만 이런 공부의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력' 사원 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을 해소해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돈 받으면서 나의 욕구?를 채우는 듯한 부채감에, 안절부절함만 더해질뿐.
나의 이런 안절부절함이 캐치가 되었던 건지 (아니면 우연인건지), 지난주에 팀 사람들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배우는 것들이 썩 와닿지 않겠지만 실무하게되면서 점차 익숙해질 거라고 한마디씩 해준 덕에 지금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조급하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짜릿함들을 충분히 즐기면서, 다음주에는 스무스한 온보딩을 완성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