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을 살아가야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랑하는 형이 죽고난 후 상실감에 빠진 패트릭 브링리는 메트로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뉴요커>의 잘나가던 기자였던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술관에 경비원으로 취직한 그는 거대한 미술관의 한 가운데 고요히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상상하고 탐닉한다.
책을 덮고나니 보였다. 영문 타이틀은 'All the beauty in the world' 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번역되었으면 아무도 안샀을듯. 한국판 제목 지은 직원은 상줘야한다. 한국인의 눈길을 자극하기 딱이네...
이 책에는 수 십개의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예술을 잘 모르는 터라 어떤 부분은 지루하여 듬성듬성 읽기도 했는데, 이 두 작품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브뤼헐 <곡물 수확>을 바라보며 나는 가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 노동을 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휴식을 취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익숙한 광경을 묘사하기 위해 피터르 브뤼헐은 일부러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의 맨 앞자리를 이 성스러운 오합지졸들에게 내주었다. 가끔 나는 어느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말기암 환자였던 패트릭의 형이 어느날 갑자기 맥너겟이 먹고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날밤 패트릭은 맨해튼의 밤거리를 뛰어나가 소스와 치킨 너깃을 한아름 사들고 돌아왔는데, 이 장면이 브뤼헐의 <곡물수확>과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생사가 오가는 시공간 또한 맥너겟만큼 흔한 우리 삶의 일부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 혹은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 어느쪽이 더 경이로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문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입은 사람, 말을 타고 이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리얼리즘이다.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형이 죽고난 후 상실감에 빠져있던 패트릭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10년 후 돌아본 그의 인생에는 꽤나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오늘은 어느 전시관을 담당하게 될지 두근거림으로 시작했던 하루가 어느새 권태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세상의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전시관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했던 때와 달리 툭하면 미술관 밖으로 마음이 날아가버리기도 했다. 명상과 같은 고요함을 음미하던 그는 이제 육아전쟁에 뛰어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버렸다.
한 곳에 가만히 서서 고여있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삶은 그를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림 속 못박힌 예수는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모두가 비통해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우리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패트릭은 새로운 꿈을 품고 10년의 경비원 생활의 막을 내린다. 패트릭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꼽은 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림은 어쩌면 그의 10년의 시간을 압축해놓은 게 아닐까.
패트릭의 옅어진 상실감은 희망과 같다.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 같은 것. 살다가 깊은 골짜기에 빠지면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