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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부엉 Nov 01. 2018

스마트, Smart

나는 언제까지 스마트한 인간일 수 있을까

'스마트' 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말로 '똑똑한' '영리한' 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그러나 어쩐지 한국말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있다. 똑똑하지만 세련되고 민첩한, 새로운 기술에 거리낌이 없고 개방적인 느낌이 한 스푼 더해져야 비로소 "스마트" 한 느낌이 난달까.


스마트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단어는 단연 스마트폰이다. 손 안의 폰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한 초연결적인 세상속에서 우리는 10년째 스마트폰에 축복과 경배를 들고 있다. 얼리어답터의 산물인 것 같았던 스마트폰은 더 이상 특정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스마트폰과 일상을 함께 하는 시대이니까. 그래서일까, 스마트폰은 초기의 '스마트' 라는 명사적 의미가 퇴색된 듯 하다. ai기술이 도래한 세상에서 이 정도의 스마트함은 스마트함도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아주 보편적인 지능에 가깝다. 그야말로 스마트함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한 인간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매일 새로워지는 기술에 유연하게 적응해나가는 이들 덕분에, 스마트함의 기준은 점점 높아지고 구체화된다. it기술과 실시간 공유에 익숙하고 무엇이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가볍게 해내는 날렵함. 한국말과 다른 어감을 품고있는 '스마트'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기술에 적응하지 못한 '평범한' 인간상도 있다.

(다소 스마트하지 못한 인간상을 지칭하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평범함이라고 묘사하고 싶다. 실제 그렇기도 하고. 머릿수로만 보면, 인터넷 뱅킹보다 은행과 ATM을 찾는 이가 더 많지 않은가.) 


스마트한 젋은이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이들의 일상은 어떨까? 오늘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에 약간의 조미료를 더하면 아래와 같다.



1. 30년간 응원하던 팀이 결승전에 올랐지만...

삶의 절반을 야구 사랑과 함께해온 60대 노년의 할아버지. 그가 응원하는 팀이 무려 30년만에 플레이오프전에 올랐다. 이 날을 위해 응원해왔던 지난 30년을 떠올리며 TV를 벗어나 경기장을 찾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 한참을 달려왔을 것이다. 현장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매표소를 찾았으나 표는 매진이다. 모든 좌석은 이미 일주일 전 인터넷으로 판매가 완료되었다.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젊은 친구들을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하는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안타깝긴하지만 예매 전쟁 시대에 현장에서 이런 귀한 표를 구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되는 세상이다.


2. 발로 뛰는 예매전쟁

서울에 사는 70대 노부부는 추석날 고향에 내려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첫 차를 타고 고속터미널역에 왔다. 새벽 6시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표를 살 수 없다. 대부분의 표는 인터넷으로 풀리고 현장 티켓은 극소수라 전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왔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노부부 앞에는 많은 인파가 줄을 서있다. 아마 전날부터 있던 사람들일 것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부풀어만간다. 두 손에 티켓을 쥐고 따뜻한 아침을 맞길 바라며.


3. 네? 사이트에 공지 했습니다만...

전주에 사는 60대 남성은 7개월 째 구직중이다. 은퇴 후 소일거리라도 해보려 일자리를 찾고 있으나 쉽지 않다. 다행히 지난 주 꽤 괜찮은 보수의 일자리 공고를 발견하여 지원서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접수가 어려워 직접 제출을 하러 갔는데 지원기간이 끝났다고 한다. 아뿔싸- 지원 기간을 착각했나 싶어 물어보니, 조기 마감되어 공고를 수정하고 웹사이트에 공지까지 했다고 한다. 달리 할 말이 없어진 그는 지원서류를 다시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한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30년간 응원하던 팀의 경기를 볼 수 없고, 명절날 고향에 내려가는 기차표를 못구해 6시간 동안 버스를 탈 수 밖에 없고, 원하던 일자리 공고를 제 때 보지 못해 오늘도 노년 백수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삶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상인가. 스마트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사소한 일상조차 불공평함으로 가득차 버린다.






누군가는 일상이 갈수록 편리해지고 스마트해지는 나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범했던 일상에 금이가는 시대에, 우리는 기술 발전 속도에 채찍질을 가하기 보다 기술 전파와 교육 방법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스마트함을 고도화하고 구체화하기 이전에, 조금 스마트하지 못한 이들까지 함께갈 수 있는 기술적 배려를 베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소수자를 향한 배려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이 스마트폰에서 비롯한 각종 생활편의적 기술에 대한 배려는 아직 고려되고 있지 않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나, 그 전에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이기 이전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니 말이다.


요즘 초등학생은 코딩 교육이 필수라고 한다. 그들이 사회의 주축 세력으로 자랐을 때는, 어쩌면 코딩으로 예매 전쟁을 하고 아파트 경비원도 코딩으로 시스템을 관리 운영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코딩을 할 줄 모르는 어른들은 스마트함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그렇게 일자리의 기회도, 콘서트나 야구경기라는 작은 일상도 빼앗겨버리겠지. 코딩을 배우던가 도태되던가- 라는 불가항적 선택은 상상만해도 너무 잔인하다. 스마트함이 누군가의 점유물로 규정되는 세상은 위험한 세상이다. 적어도 지금같은 속도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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