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하겐다즈 바닐라 아이스크림
사람은 얼마나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지. 나는 퀘사디아와 사워크림을 모두 베니건스에서 처음 먹어봤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우리 페퍼리의 촬영 감독님(유튜브 채널 ‘페퍼젤리컴퍼니’,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이나은 씨는 베니건스에 대해서 ‘음, 언니를 따라서 한 번 가본 적은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퀘사디야도 몬테크리스토도 모르는 세대와 촬영을 같이 하고 있었다니. 나 라떼야? 꼰대야?
여하튼 나는 동갑내기와 결혼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집안에서 우리끼리 ‘그때 그 음식’을 재현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번 발렌타인에 먹고 싶은 메뉴는 베니건스에서 먹었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올린 따뜻한 초콜릿 케이크’였다. 누가 먹고 싶었냐면 나다. 원래 발렌타인은 선물이라는 핑계로 내가 먹고 싶은 초콜릿을 만드는 날이니까.
그래서 하나하나 정리를 시작했다. 우선 초콜릿 케이크는 브라우니로. 그래도 발렌타인인데 평소랑 똑같은 브라우니를 만들면 조금 서운하니까, 새콤해서 단맛을 약간 상쇄시킬 수 있는 체리를 넣자. 한 판은 평소처럼 사각형 틀에 굽고, 조금 덜어서 무쇠 팬에 체리 브라우니를 굽는 거야. 그러면 가장자리는 살짝 쫀득한 크러스트가 되면서 속은 촉촉하겠지. 냉동실에 나 아포가토 해 먹으라고 박 차장이 사다 놓은 하겐다즈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있으니까 그걸 쓰자. 좋아!
브라우니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초콜릿의 형태다. 달콤하고 약간 쌉싸름하면서 녹진하고 부드러운, 초콜릿 맛 가득한 무언가. 판 초콜릿도 좋아하고 트러플 초콜릿도 좋아하지만 판 초콜릿은 조금만 더 다른 재료가 들어가서 부피감이 생기면서 초콜릿의 맛은 덜 응축된 느낌이 되었으면 좋겠고, 트러플 초콜릿은 부드럽고 살살 녹아서 좋지만 조금만 더 보송보송한 느낌이 되어주길 바란다.
물론 완벽하게 이상적인 형태가 되려면 브라우니 자체도 내 취향에 맞아야 한다. 세상에는 보송보송 케이키한 브라우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일단 나는 아니다. 초콜릿 케이크가 오버쿡되어서 메마르면 나는 먹을 수가 없다. 이런 것으로 칼로리를 채우고 싶지 않아....! 메마르면서 내 취향인 초콜릿 케이크는 그냥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속이 촉촉한 구움과자류는 전부 좋아한다. 반숙 카스텔라, 몰튼 초콜릿 케이크, 라바 케이크, 초콜릿 수플레…. 그만하자 괴롭다… 나는 밤 10시가 지난 시간에 이걸 쓰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가?
미국에서 브라우니는 중고등학교 때 만드는 엄청 쉬운 홈베이킹 종류에 들어간다는데.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도무지 시판 브라우니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잘 없다. 그 와중에 몇 개 꼽을 수 있는 브라우니 맛집은 지나칠 때마다 한두 개씩 사다가 냉동 보관한다. 그리고 초콜릿 응급 상태(지금 당장 먹어야 해)가 발생하면 꺼낸다. 하지만 역시 기억에 남는 맛있는 브라우니는 내가 만들었거나, 직접 구워서 선물로 받은 것 등이다.
이렇게 브라우니에 까다로운 편이라, 지금 자주 쓰는 레시피보다 조금 더 촉촉하고 맛있는 레시피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새로운 브라우니 레시피를 테스트한다. 아직까지 부동의 1위는 쿡스 일러스트 레이티드 레시피를 약간 변주한 내 레시피다. 아몬드 가루로 구운 것이 매우 촉촉해서 아슬아슬하게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에는 에피큐리시어스의 퍼지 브라우니를 구워 볼까 했는데, 막판에 레시피를 읽어보니 무가당 초콜릿을 써야 하길래 따로 주문하기 싫어서 포기했다. 그래서 지금 쓰는 레시피와 재료 비율, 굽는 방식을 비교했는데 재료 비율은 달걀 외에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물론 설탕 비율이 똑같은데 초콜릿이 무가당이라 단맛은 많이 덜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굽는 레시피보다 오븐 온도가 25도 높고 굽는 시간이 15분 정도 짧았다. 낯설어서 처음에 넘어갔던 레시피 설명을 읽으니 역시 그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겉은 충분히 익으면서 속은 촉촉한 퍼지 브라우니가 보장된다고. 그래서 평소 굽던 레시피를 그대로 사용하되 오븐 온도와 굽는 시간을 바꿔봤는데 대성공이었다. 당분간 이 레시피가 내가 누울 곳이다.
아, 그리고 이번에는 체리가 들어갔다. 체리도 좋아하고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도 좋아해서 제철도 아닌데 갑자기 꽂혀버렸다. 사실 우리나라에 수입해서 들어오는 생체리는 여기 넣기에는 너무 달기만 하다. 그래서 새콤한 냉동 체리를 샀으니 제철이고 뭐고 가릴 것은 아니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키르슈도 구해서 좀 넣어보고 했을 텐데 설 연휴 내내 출근하듯이 여섯 시간씩 풀로 일하고 발렌타인을 맞이하는 바람에 체리를 해동해서 바닥에 까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시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새콤한 체리가 엄청 달콤하고 촉촉한 브라우니와 원하는 대로 잘 어우러졌다. 그리고 접시에 남는 진득한 초콜릿과 검붉은 체리 즙 자국... 농염하고 호화롭고 섹시하다... (언제나 음식에서 사랑을 느끼는 사람)
아무튼 그래서 자주 쓰는 단골 레시피를 조금 더 업그레이드했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나처럼 이 레시피 반죽을 조금 덜어서 16cm 크기 무쇠 프라이팬에 담아서 오븐에 굽는다면 우선 굽는 시간을 16분 정도로 줄여야 한다. 브라우니는 과조리 금지! 그리고 오븐에서 꺼내고 나면 30분 정도 식힌다. 브라우니 가운데 부분이 초콜릿 용암과 같은 상태라서 입 안의 상피 세포를 싹 다 갈아엎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기 15분쯤 전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꺼내놨다가 퍼야 잘 퍼진다.
미리 경고: 이 브라우니 레시피는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만 따라 할 것을 추천한다.
1. 브라우니는 쫀득하고 찐득하고 촉촉해야 한다.
2. 초콜릿 맛이 강하고 달콤해야 한다.
3. 한 조각만 먹어도 충분할 정도로 달콤해야 한다.
미리 경고하는 것은 덜 익었나 싶을 정도로(실제로 덜 익었다) 촉촉할 때 꺼내야 하고, 진짜로 달기 때문이다. 커피 가루와 코코아 파우더로 쌉싸름한 풍미를 더해 맛은 풍성하지만 어쨌든 달다. 진짜 달다. 맛있지만 달다!
내가 원하는 브라우니가 바로 이런 식이다. 한 조각만 먹어도 나가떨어질 정도로 달고 촉촉해야 할 것. 그래야 차라리 다이어트에도 좋다. 한 조각 이상 먹을 수가 없으니까.
*브라우니는 절대 '가운데를 꼬챙이로 찔러서 깨끗하게 나올 때까지' 구우면 안 된다. 건조해진다.
*체리 브라우니를 만들려면 팬 바닥에 해동한 냉동 체리를 깔고 반죽을 부어서 구울 것.
퍼지 브라우니
재료(20cm 크기 정사각형 틀 1개 분량)
세미스위트 초콜릿 200g, 무염 버터 100g, 코코아 파우더 3큰술, 인스턴트커피 1 1/2큰술, 달걀 3개, 설탕 250g, 소금 1/2작은술, 바닐라 익스트랙 2작은술, 중력분 120g
만드는 법
1. 오븐을 200도로 예열한다. 베이킹 틀에 유산지를 깐다.
2. 볼에 다진 초콜릿과 버터, 코코아, 인스턴트커피를 넣고 중탕에 올려 녹인다.
3. 다른 볼에 달걀과 설탕, 소금, 바닐라를 넣고 잘 푼다. 녹인 초콜릿 혼합물을 천천히 부으면서 쉬지 않고 휘저어 잘 섞는다.
4. 밀가루를 체에 쳐서 넣고 잘 섞는다. 준비한 틀에 붓고 윗면을 평평하게 고른다.
5. 오븐에서 23분간 굽는다. 꺼내서 실온으로 식힌 다음 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