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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Jun 05. 2024

가난의 경험을 패션에 럭셔리하게 활용한 코코 샤넬

대중에게 부와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한 샤넬은 모든 면에서 멋진 비주얼을 갖추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명품으로 태어난 브랜드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히트 쳤으나 성분, 성능까지 뛰어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샤넬 화장품이나 샤넬 의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브랜드 이미지가 좋아서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샤넬은 가장 값싼 소재로 럭셔리를 만들어 낸 최초의 디자이너이다.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도시 루아르 강변이 보이는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행상인 딸로 태어나 언니와 함께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지루하고 가난하게 살았고 그녀에게 귀속된 억압과 가난은 훗날 그녀의 패션에 많은 영감을 주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샤넬이 12살 때 그녀의 엄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이후 그녀 아버지는 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방랑생활을 하다 영원히 사라졌다. 그 뒤로 샤넬은 가톨릭 수녀들이 있는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샤넬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못 먹고 못 자라서 미숙했지만 누구보다 똑똑했다. 그리고 아름답고 영특했던 샤넬은 주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모습들을 유난히 눈빛을 반짝이며 관찰했고 그러한 샤넬의 눈썰미는 최상급이었다. 


1901년 열여덟 살이 된 샤넬은 고아원에서 나와 자신보다 몇 살 많은 고모 아드리아네와 함께 살게 되었고 재봉사로 취직하게 된다. 샤넬은 우연한 기회로 패션계에 인맥이 있는 부류들과 어울렸고 그녀가 미처 익히지 못한 상류 사회의 매너 등을 그녀와 어울린 부유한 남자들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매너 있는 행동을 스스로 곁눈질하면서 익힌 것도 있었고, 오다 가나 만난 지인들의 도움도 받았다. 


샤넬은 자신이 본 남성 스웨터, 선원용 트리코트, 정비공의 블라우스, 웨이트리스의 화이트 컬러 등을 눈여겨보다 심플하고 세련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부모 없이 홀로 생을 지탱해야 했던 샤넬은 남들보다 영악하고 치열한 생존 본능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녀는 디자이너로서 드로잉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바느질하는 것은 좋아하지도 않았다. 샤넬은 그저 타고나길 센스 있는 사업가며 안목 있는 특출한 기획자였다. 그리고 재력 있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이용할 줄 알았다. 


산업 시대를 맞이하여 대량 복제 및 대량 생산에 최적화된 디자인과 재료 수급에 중점을 두었고 어찌 보면 오늘날의 패스트 패션의 원조가 샤넬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아이러니하게 현재 샤넬은 럭셔리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무엇보다 샤넬은 통속적으로 럭셔리의 반대가 푸어 즉 가난이라고 하는데 반기를 들고 럭셔리의 반대는 가난이 아닌 천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1912년 그녀는 샤넬모드를 세우고 빠른 성공을 거듭하며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갔다. 1921년에는 지금도 유명한 샤넬 NO.5 향수를 개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샤넬은 지속해서 귀족, 시인, 부유층, 예술가 등과 친분을 쌓으며 확고한 명성을 쌓아갔다. 처음 모자 디자이너로 출발해서 점차 의상에서 화장품 등으로 확대하면서 당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우뚝 선 그녀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샤넬은 독일 장교와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프랑스의 나치와 협력했으며 스파이 활동을 했다. 본의 아니게 정보를 주었을 수도 있지만 어릴 적부터 생존 본능이 강한 기회주의적 성향의 샤넬이니 인정할 건 해야겠다. 그러나 샤넬은 나치 정권이 영원할 줄 알았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샤넬은 회사가 히틀러식으로 아리안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녀의 사업에 도움을 준 유대인 사업 파트너를 밀고하거나 추방하려고 애썼다. 그것도 1921년에 출시하여 불티나게 팔린 샤넬 넘버 파이브를 만들어 준 조력자를 말이다. 전쟁이 끝난 후 샤넬에게는 당연히 은둔의 시간이 필요했고 나치에 편승했던 오명 및 침체기를 딛고 1954년 재등장하였다. 그녀는 다시 깡봉가에 문을 열고 금장 단추에 가장자리를 트리밍 처리한 슈트, 이미테이션 액세서리, 골드 체인의 누빔 스티치가 들어간 백 투톤 슈즈 등 지금까지도 대표되는 어마무시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대성공하였다.



그것이 그녀 나이 71세 때 한 일이다. 샤넬의 사상은 그른 판단을 했을지 몰라도 샤넬의 패션 감각은 항상 옳았던 것이다. 1960년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을 때도 샤넬은 기류에 편승하기보다 미니스커트를 혹평하며 남자들이 여자를 왜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지 이유를 알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샤넬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스커트 라인은 무릎 바로 아래 라인이었다. 샤넬은 코르셋과 치렁치렁한 스커트를 심플하게 바꾸어 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샤넬은 편안한 의상. 심플한 고급스러움, 그러면서 여성스러운 우아함을 찾아 노력했다.



하지만 나치에 편승한 죄로 샤넬의 이름 뒤에는 불명예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슈트를 보고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의 과오를 망각하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그리고 1971년 1월 10일 코코 샤넬은 마지막 컬렉션 발표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기에 고국인 프랑스 땅에 묻히지 못하고 망명지인 스위스에 묻혔다.


샤넬 사후 칼 라커펠트가 1983년 입성하였고 샤넬 전통을 고수하면서 독창성과 열정 그리고 고급스러움으로 샤넬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역량을 보여주며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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