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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Dec 17. 2022

달리기를 하고 나서 생각한 것들 5

9월 첫 주의 달리기를 시작하고 한 바퀴 돌았을 즈음 유아차를 천천히 끌고 가는 한 엄마와 마주쳤다. 밤 9시 30분, 유아차에 타고 있는 아이는 두 돌 전후로 보였고 마스크를 쓴 엄마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한 바퀴 더 돌고 만났을 땐 아이 엄마가 눈물방울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저 엄마는 온종일 아이를 봤을 테지, 잠자리에 일찍 들지도 못하는 애를 데리고 갑갑해하다 밖으로 나왔을 테고. 유아차에 태우고 돌아도 쉬 잠들지 못하는 아이에게 짜증도 냈다가 안고 달래기도 했다가 이내 또 막막해했겠지.’


그건 영락없는 몇 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낮에도 유아차를 몰던 중 수시로 눈물을 흘렸고 햇살 좋은 날씨와 대조적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당황하기 일쑤였다는 거다.


사람의 공감능력은 자신이 경험한 범위를 넘어서기 힘든 것 같다. 아이를 낳기 전에 유아차를 끌고 가는 엄마들을 볼 때면 엄마와 아이가 있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유아차를 끄는 엄마들이 내 관심대상이 아니었던지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본다. 어딜 가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한 쌍, 서로 가장 가깝고 친밀해서 고달프기도 한 관계의 그들을.


나는 아이를 키우며 내 공감능력의 한계를 자주 본다. 자기 본위의 판단 혹은 자기 착각에 자주 빠졌고, 특히 아이가 어릴 때 아이의 반응을 잘 해석할 수 없었다.

심윤경은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할머니를 자주 떠올렸다. 무심한 듯 다정하고 편안하게 대해주던, 짧은 몇 마디에 애정을 담뿍 담던,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던 할머니를 회상하며 육아 중인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작가는 신생아였던 아이에게 언어 자극을 주기 위해 자신의 특기를 십분 살려 실황중계 캐스터처럼 많은 말을 내뱉었다. 아이가 자신의 말을 듣기 싫어 고개를 한쪽으로 계속 돌렸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 알게 됐는데, 자신의 말이 재밌어 보인 반응이라 생각했지 시끄러워할 줄 몰랐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말에서 나 또한 나의 착각과 오만함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줘야 한다는 것, 어릴 때 수다쟁이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엄마들에게 부과된 수많은 정언명령 중 하나가 아닌가)이 머리에 맴돌아 나는 누워있는 아이에게 이야기도 지어서 들려줬고, 생활의 이야기도 계속 조잘댔던 것 같다. 놀이터나 공원에 나가서도, 키즈 카페에서도. 하지만 “엄마가 이렇게 말을 많이 걸어주니 아이가 말이 빠르겠어요.”라는 이웃의 말에 어느 순간 무안함을 느낄 만큼 내 아이는 말이 느렸다. 두 돌이 한참 지나서도 할 줄 아는 단어가 몇 안 됐으므로.


얼음 깨기 보드게임판 위에서 내가 겨냥한 얼음이 아닌 엉뚱한 자리의 얼음이 아래로 빠지듯, 육아는 자주 예상을 뒤엎고 정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날들과 함께한다는 걸 그때 확연히 깨달았던 것 같다. 또, 내 노력과는 관계없이 아이에게 필요한 시간이 아이마다 다르다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속에 어떤 교만함이 들어있다는 것도.


그 교만함의 저변엔 이런 생각들이 깔려 있었다. ‘나는 이만큼 하고 있고, 그러니 나는 적어도 나쁜 엄마는 아니다.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배울 만큼 배우고 읽을 만큼 읽어 교양도 좀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키우는 아이도 어느 정도는 잘할 것이다’라는 생각들.


심윤경 작가는 어린 엄마였던 자신의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애면글면 키웠던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며 저지르는 만행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감정까지 솔직하게 보여준다. 도심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한다는 사춘기 아이가 시간이 다 되도록 폰만 보고 꾸물거리자 재촉했더니 돌아온 말, ‘내가 알아서 할게.’ 결국 시작 시각이 지나 참가 못할 게 훤히 보였고, 차라리 이참에 실패를 겪으며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겪어보았으면 바라는 마음에 자식의 실패를 예상하며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엄마의 뜻과는 달랐다. 참가자 대부분이 사춘기 청소년이었으므로 이 아이들이 떼로 늦으면서 시작 시간이 늦춰졌다는 것.

내가 심윤경의 에세이를 읽을 때 아이는 그림책 <엄마 도감>에 빠졌다. 아이를 낳는 모든 여자는 아이의 출생과 동시에 엄마로 태어난다. 아기가 바라본 엄마라는 존재, 자라나는 아이의 기억 속에는 들어있지 않은 갓 태어난 엄마를 그려낸 책이다. ‘가장 고귀한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소외되었던 엄마의 출생’이라는 소개글에 걸맞게 이 책은 엄마를 위한, 엄마를 위로하는 책이건만 희한하게도 아이도 이 그림책을 아주 좋아했다. (특히 아이는 깨고 엄마는 지쳐 누워있는 장면을 그렇게 좋아했다. 읽어주는 내 연기력 때문이라고 나는 또 자신만만하게 말해본다.)


유아차를 몰고 가며 울던 엄마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 무리의 중학생(또는 고등학생)을 만났다. 아파트 가운에 잔디광장에 앉아있던 다섯 명의 아이들은 웬 아줌마가 한밤에 뜀박질을 하는지 궁금해했을까. 학생들 눈에 비친 나는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아줌마였을까, 저 아줌마가 왜 뛸까 생각은 해봤을까. 아니면 그들 눈에 나는 보이기는 하는 사람이었을까. 자기들만의 이야기와 웃음과 걱정들로 다른 것들은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나지 않았을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되는 부끄러움도 있는 걸 깨달으면 사람이 좀 더 자주 머뭇거리게 되고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그다지 똑똑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내 생각이 옳다는 건 착각일 가능성도 많다는 것. 그걸 염두에 두면 아이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부디 사춘기 아이들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보길 바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뜀박질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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