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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May 22. 2023

치유의 글쓰기

2017년 12월의 글


속에 꽁꽁 뭉쳐 두었던 검은 덩어리 주위로 검은 물이 스며 나와, 나는 짙은 회색으로 감싸졌다. 우울함을 숨기기 위해, 애써 밝게 보이려 애썼다. 지나친 밝음 아래에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책을 쓰면서, 나는 검은 덩어리를 만져보려 무던히 애썼다. 그 실체를 보려고 애쓰면서도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아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처음에 쓴 첫 꼭지를 몇 달 후에 다시 읽었을 때에, 내가 이토록 실체를 외면하려 애쓰고 있었구나를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책을 다 쓰고 나서는 더 이상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은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제는, 설거지를 하다가 문장 하나가 생각났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한 단락정도는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고요한 밤,
컴퓨터를 켜고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낮에 생각한 그 글을, 한 단락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그 뒤로는, 생각해놓지 않았더라도, 그냥 손이 움직이는 대로, 생각의 흐름과 함께 이 여백을 채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 단락을 채웠다. 그리고 나니,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를 부연설명하기 위한 배경을 펼쳐놓을 차례였다.
배경에는 내가 경험했던 그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피해서, 가볍게 써보려고 해 봤지만 그 사건을 피하지 않고는 첫 문장이 설명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도망가서, 그 주위의 일들로 설명하려 해 보았지만, 그 사건을 꺼내놓지 않으려니 첫 문장은 설득력을 잃고, 사그라들어버릴 것 같았다.

피할 수 없어서, 나는 써내기 시작했다.
아팠던 것. 내 눈으로 다시 보기 두려웠던 것. 글로 쓰기 위해 다시 떠올려야 하는 순간을 직면해야만 했고, 그래, 이렇게 된 것, 그냥 직면해 버리겠다. 하고 마구 쓰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다. 그 시절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자, 그 끔찍한 고통스러운 시간을 다시 보내야 했다.
울면서 썼다. 그 시간을 있었던 그대로 꺼내놓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날것으로의 검은 실체. 책 한 권을 다 쓰도록, 끝내 꺼내놓지 못했으면서도, 이제 괜찮아진 줄 알았던 그 사건들.

그것은 나의 일이었으므로 나만이 꺼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꺼내어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나는 하지 못했더랬다.

용기를 내어 쓰기 시작하자
마치 둑이 터지듯,
A4 열한 장을 써내었다.
처음에 가볍게 웃으며 시작되었던 글은,
결국 피하고 싶었던 내부의 상처 깊숙이 들어가 닿았다. 글을 쓰는 두어 시간을, 나는 쉴 새 없이 꺽꺽 울었고, 혹여나 남편이나 아이들이 깰까 봐,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오늘 아침에도
슬픔은 가시지 않아
아이 눈을 볼 때에도,
남편을 배웅할 때에도
눈물이 배어져 나왔다.






나는 이제 안다.
꺼내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는 것을.
어제는 꺼이꺼이 울었고
오늘 그 글을 읽으며 또 울 것이다.
울면서 더 넣을 문장을 찾고
다듬고
어딘가는 뺄 것이다.
둥글게 둥글게 만들면서
문장을 다듬어 갈 것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한 꼭지를 쓴 후
며칠간 다듬었다. 최소 일곱 번에서 많게는 열 번 이상씩 퇴고를 했다.
그리고 그다음 꼭지를 썼다.
다음 꼭지도 그렇게 오랫동안 퇴고를 했다.
열 번 스무 번 읽고 고치고 읽고 고치다가
어느 날은 통째로 지워버리고 다시 썼다.
그렇게, 여섯 달을 꼬박
나는 쓰고, 고치고, 지우고,
그리고 썼다.

첫 번째 꼭지가,
사건의 진실에 가 닿지 못하고,
열 번의 퇴고 끝에도 사건이 주위만 맴돌았다면,

마지막 꼭지를 쓸 때에는
사건 깊숙이 들어가
그저 타자를 탁탁 치며
있었던 사실을 써나갈 수 있었다.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그것을 나는, 여실히 느꼈다.

초고를 완성한 후,
시어머니 이야기의 대부분을 들어내 버렸고
부모님께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도 거의 다 들어내 버렸다.
이제 그렇게까지 힘든 사건이 아니게 되었으며
그렇기에 들어내 버리는 것도, 아쉽지 않았다.
계약 후에, 그렇게 책의 3분의 1 이상을 지우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 넣었다.
지극히 감정적인 부분이 잘려 나가고, 나를 더 꺼내어 볼 기회를 맞이했다.

그렇기에, 나는 안다.

꺽꺽 울면서라도 꺼내놓으면 이 아픔은 갈 곳을 잃고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것을 안다.

꺼내었다고 오늘 바로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나를 힘껏 휘저어 삶을 마구 헤집어놓는 것 같아도, 덮어 놓았다가 평생 휘저어지느니, 지금 스스로, 자발적으로 꺼내어, 여러 번 날것으로 대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안에서 그 힘을 완전히 잃게 될 것임을, 나는 이제 안다.



퇴고에 퇴고.

내가 쓴 글을 계속 읽고

되새기고, 고치고, 또 읽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내 글이 마치 남의 글인 것처럼 글에서 내가 떨어져 나와 3자의 눈으로 내 글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경험했으니, 나는 울면서도 쓴다.

그것은 출판될 수 없는 글일 것이다. 언젠가는 훌훌 털고 한 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글일 것이다.

드디어 꺼내었으니 실체를 마주하고 나를 토닥이며 안아준다.

잘 견뎠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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