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을 매일매일 실험하며 사는 동안 작품이 많이 쌓였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실험'이다. 나란 인간은 새로운 것을 만날 때에 눈이 반짝반짝해지며 반쯤 실성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밤하늘을 레진으로 만들어보자.
판넬에 검정 젯소를 바를 것인가, 색을 그냥 칠할 것인가. - 해본다.
색을 칠할 것인가, 어두운 색의 레진부터 바탕에 부어볼 것인가. -해본다.
별을 그리는 대신 반짝이를 얹어보자. -해본다.
아이고, 이런 큰 반짝이는 너무 튀는구나. 입자가 작은 반짝이를 얹어보자. -해본다.
이런 색 반짝이는 또 어떨까? - 해본다.
두 가지 반짝이를 살짝 섞으면 어떨까? -해본다.
반짝이 작품에 어두운 레진을 부어볼까? -해본다.
오로라를 만들어볼까? 어떻게 흐르게 만드는 게 좋지? 요 방법으로 해보자, 저 방법도 해보자
아래 모래로 만들어볼까?
금색 펄을 모래 대신 쓰면 어떻게 될까? 금박은?
검정 돌을 올리면 어떻게 될까?
이게 굳은 뒤에 조개를 올릴까, 먼저 올리고 투명 레진 작업을 할까.
밤에 자다 눈을 번쩍 뜬다. 너무 궁금하다. 어제 부어놓은 것,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요 작업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면 신이 난다. 작업방으로 달려가 전투태세로 또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다. 이런 걸 다 해보면서 가장 적합한 것을 알아간다. 예쁠 줄 알았는데 안 예쁜 것(탈락), 이게 될까 반신반의했는데 해보니 예쁜 것들이 속출한다. 여하튼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몇 점의 성공작이 생기고 실패작도 생긴다.
이런 시간을 쌓다 보니 첫 개인전 즈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4년 전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외국작가들의 화려하고 놀라운 작품들을, 이제 나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 작품과 내 것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첫 번째 개인전을 끝내고 자신감이 생겼다. 인스타로 알게 된 갤러리 카페 몇 군데에 먼저 메세지를 보내, 전시하고 싶은데 가능한지 물어보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아는 언니가 소개해준 갤러리와 계약하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전시를 한 주 남겨놓고 폐업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작은 갤러리 카페와 계약했지만, 50만 원이라는 전시 비용이 부담되어 포기하기도 했다. 몇 번의 전시가 어그러졌다.
익숙해진 것은 이제 상품화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 아닐까? 이제 크기를 더 키울 수도 있고 색상을 다르게, 배치를 다르게 하면서 계속 비슷한 작품을 만들면 된다. 비슷한 결이 쌓이면 그것이 나의 색깔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준에 이르자, 이것을 나의 한계로 만들고 싶지가 않다. '외국 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작품' 정도로는 나를 표현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어쩌면 '색깔이 없는' 작가가 되는 건 아닐까.
첫 개인전에서 <동네 사람들아 보세요, 나는 잉크도 하고 레진도 하고 아크릴화도 그려요> 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주겠다는 태도였다면, 다음 전시에서는 정제된 색깔을 보여야 할 차례였다. 세 가지 네 가지 잘한다고 보여주고 싶어서 모든 작품을 다 걸어놓는 것보다 한 가지 색깔을 더 많이 보여주는 방향으로.
남들과 차별된 그림, 그러면서도 레진을 사용하는 방법엔 뭐가 있을까.
아크릴과 레진을 접목해 보자.
아크릴 물감으로 그러데이션을 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너무 빨리 마르기도 했고, 물 자국이 남지 않아야 하는데 대체 다른 사람들은 이 물감으로 어떻게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표현을 할 수 있는 걸까. 이런저런 방법으로 칠해보다 어느 날, 엇! 하며 어떤 방법이 찾아졌다. 몇 달간 스케치대로 한 면에 한 색 칠하기만 할 수 있었는데 드디어! 방법을 찾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이제, 여기에 레진을 덮어볼 차례였다.
자, 레진 작업을 끝내고 그 위에 아크릴화를 덧그려 그림에 깊이를 줄 수 있을까?
배경이 아까워서 쉽사리 시도하지 못하고 아주 천천히, 공들이며 심호흡하며 그림을 완성시켜 갔다. 마침내 이 작품이 성공했을 때, 나는 속으로 마구마구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스타일'이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그림의 결. 겁내고 시도하고 오롯이 내가 찾아낸 것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모든 그림이 새로운 시도였으므로, 혼자 작업실에 앉아 기뻐했다.
첫 전시 후 해를 넘겨 2022년 초, 1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그림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에도 혜영언니의 소개를 받았다. (나의 은인!)
작고 귀여운 작품부터 처음 그린 100호 그림까지, 모든 작품이 새로운 시도였고, 스스로 볼 때에도 정말 아름다웠다. 감사하게도 지인들이 작품을 많이 사주셔서 또 한 번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