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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클라쓰 Jun 25. 2020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마음 자세

"그리고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도 마땅히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하고 성, 향, 미, 촉, 법에도 머무르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되 상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을 가히 헤아릴 수 없다."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 금강경金剛經,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중     


나의 지식과 깨달음은 오롯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지식에 대한 소유욕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다. 내가 가진 지식이 나의 가치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싶었고, 이것으로 누군가보다 더 우월해지고 싶었다. 대화를 하다가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속으로 알 수 없는 승리감 같은 것에 도취될 때도 있었다. 강의를 하게 된 이후에도 비슷한 감정들을 계속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식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을 내가 받아들인 것에 가깝다.     

지식뿐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무언가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현명한 이들이 이미 접근했던,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어떤 깨달음에 나 또한 접근한 것일 뿐 새로운 것은 많이 없지 않은가.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 전도서1:9~10     


언젠가 내가 엄청난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공부를 거듭하다 보면 수천, 수백 년 전 누군가가 이미 깨달아 오늘까지 전하고 있는 이야기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어떤 깨달음이 내 것이라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다시 말해 '상(相)'에 머물지 않으면, 베푼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인 양 꽁꽁 싸매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따라서 지식과 깨달음 베푼다는 것은 다만 이것들을 흘러가도록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의를 ‘제대로’ 하려면 그래서 집착이 없어야 한다. 내 것에 대한 집착,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진정으로 깨달음을 주는 강의를 전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금강경에서는 그러므로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 곧 깨달음을 전할 때 복덕이 크다 말한다. 내가 비워지고, 내가 가지고 있던 집착을 벗어날 때 진정한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지식과 얄팍한 깨달음을 과시하고,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강의 또는 승리감에 도취되기 위해 하는 강의가 진정으로 (불교의 표현을 따르자면) ‘중생’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석가는 2500년 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 이것도 전혀 새로운 깨달음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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