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누이, 디오니소스 그리고 예수
1985년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소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이하 향수)를 출간합니다. 출간 즉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2천만 권 이상, 48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20세기 들어 가장 많이 팔린 독일 소설 중의 하나라고 하네요. 살인자의 이야기에 이토록 세상이 열광한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향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가운데서도 이례적으로 굉장히 어두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최상의 향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하는 자입니다. 그게 타인의 생명을 대가로 한다고 해도 말이죠.
이 소설은 그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되는데요. 영화 역시나 원작의 내용을 잘 살린 수작으로 평가받으며, 아직도 명작으로 꼽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괴한 살인자의 모습이 성경 속 ‘예수’의 모습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아시나요? 사실 향수의 주인공 또한 기괴하긴 하지만 '메시아'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주인공 그르누이가 수많은 여인들의 희생을 통해 마침내 제조한 궁극의 향수를 맡는 즉시 그를 천사로 오인하게 됩니다. 향수를 향한 파멸적인 집착과 군중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는 그르누이의 모습은 마치 성경 속 예수 이야기와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 또한 옳다고 믿는 진리를 위해 헌신했고 군중들에게 자기 몸을 내주는 십자가 형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이한 유사성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향수의 주인공은 차례차례 여인들의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예수는 타인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리지만 그르누이는 자기 자신을 희생해 타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죠.
이 외에도 유사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서로 닮은 듯하면서도 상반된 기이한 유사성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요? 오늘은 소설과 영화로 우리에게 유명한 '향수'라는 작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두 가지 사랑
향수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살해해 그 향기를 채취합니다. 이 향들을 가지고 세상에 없던 최고의 향을 만드는 게 그르누이의 목표인 것이죠. 그르누이는 왜 최상의 향수를 만들고 싶어 하는 걸메시아? 먼저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그르누이의 몸에서는 아무 향도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작 소설에서 그르누이는 이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냄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완전히 자기 자신의 냄새에 파묻혀 있는데도 어떤 방법으로도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천부적인 후각을 지녔지만 정작 자기 몸에서는 아무 향기도 맡지 못했던 그의 치명적 결여가 그르누이로 하여금 타인의 향기를 비정상적으로 탐하게 만들었습니다. 타인의 향을 통해 만든 향수를 가지고 자기 몸에 최상의 향을 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르누이의 정체성이자 인생의 목표가 되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채워나가는 행위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타락한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파괴하는 사랑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르누이는 오직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사랑이 향한 방향은 상대방의 내면이 아니라 우아한 겉모습과 그 향기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향기가 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아니고 또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해서 못된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그르누이가 탐한 것은 오로지 타인의 표면이었습니다.
이런 병적인 사랑은 예수의 사랑과는 정반대의 면모를 보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도 세상을 사랑하기에 이 땅에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사랑을 베푼 대상은 그르누이처럼 겉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들이 아닌 비천하고 불쌍한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장 31~32절-
실제로 예수는 사람들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어부, 창기, 세리와 같은 사회 최하층들과 어울려 다녔다고 합니다. 그들의 내면을 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을 행위일 것입니다.
2. 자칭 메시아
영화 속 그르누이는 마치 메시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르누이는 여인들을 죽여 얻은 궁극의 향수를 통해 모든 이들이 숭배해마지 않는 천사로 칭송받습니다. 그리고 그루 누이를 비난하며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도 지고의 향을 맡아보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쾌락에 자신들을 맡깁니다. 이 천사는 최상의 향기를 선사하는 은총으로도 부족했던지 종국에는 자신의 뼈와 살까지 군중들에게 내주게 됩니다. 군중들은 이런 대자비에 응답해 그르누이를 뼈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그르누이가 수많은 여인들을 향해 던졌던 사랑을 자신의 방식 그대로 돌려받으면서 끝이 나게 됩니다.
사실 성경에도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장 51-53절-
그러나 이는 그르누이의 식인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낫습니다. 그르누이의 식인은 이유모를 끌림이기는 했지만 군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예수는 그것을 거부하는 민중들에게 마치 식인을 권하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가 진짜 식인을 권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단지 자기의 피와 살을 먹으면 너희 속에 참다운 생명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죠.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권유에 의해 그의 피와 살을 먹었을 제자들은 생명을 얻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을 맛본 제자들은 그 생명을 주는 피와 살을 다른 이들에게도 권유할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이렇게 전달됩니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군중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그르누이의 식인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습니다. 그르누이의 식인은 생명 대신 자신과 타인들의 죽음을, 기억 대신 메시아에 대한 망각만을 남길 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찬란했던 그르누이였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처럼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뿐입니다.
3. 디오니소스
그르누이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빚은 메시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이 메시아는 예수의 이야기와 겉모습은 같으면서도 그 속은 정반대입니다. 사실 이런 특이한 유형의 메시아는 니체가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에게 ‘디오니소스’를 그의 새로운 신으로 제시합니다. 그르누이가 최상의 예술적 체험을 통해 결국 타인들을 매료시키고 황홀경에 빠지게 했듯이 디오니소스도 우리에게 그런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것이죠.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하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이 다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대립되고, 억압된 자연이 자기의 잃어버린 탕아인 인간과 다시금 화해의 제전을 축하하게 된다.”-『비극의 탄생』, 니체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 바카날리아(Bacchanalia)라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할 때는 종교적 황홀경과 함께 난교가 동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은 이유모를 무아경에 자주 빠졌고 스파라그모스(Sparagmos)라는 축전의 절정에서는 동물을 산채로 갈기갈기 찢어 그 살과 피를 마셨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은 광기를 신성시했으며 이런 행위가 신의 피와 살을 나누는 것이라고 믿었죠. 또 자신들이 먹는 이 짐승이 디오니소스의 환생이라고 여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종교적 황홀경이 동반된 난교, 자기들이 신이라고 숭배하는 자를 통해 무아경에 빠지고 그를 갈기갈기 찢어 먹는다는 디오니소스 축전이 그르누이와 그를 둘러싼 군중들과 겹쳐 보입니다. 한편 앞서 이야기했듯이 축전의 형식과 디오니소스의 모습들이 예수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향수에서는 그런 표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디오니소스 축전에서는 마치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디오니소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는 이런 축제는 3일간 이뤄졌다고 하죠. 예수가 마치 3일 만에 부활한 것처럼 말이죠.
혹자들은 이런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유사성을 가리켜서 예수가 디오니소스를 필두로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형식이 유사하다고 해서 같은 부류의 신화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유사성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르네 지라르 같은 철학자는 예수의 신화가 디오니소스와 그 외 수많은 신화 속에 나오는 희생 제사와 형식이 같은 이유는 역으로 그것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문화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드러내되 그 안의 내용은 정반대인 사랑과 용서를 담은 것이죠.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관계를 '실제 범죄 현장과 범죄 현장 시뮬레이션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에서 각종 언론 기자를 모아 놓고 형사들이 범죄 현장 재연하는 것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 범죄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정확하게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죠. 그래야만 많은 이들이 보고 적합한 처벌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이와 같이 범죄 시뮬레이션과 실제 범죄는 같은 모양을 띄고 있습니다만 그 목적이 정반대입니다. 범죄는 말 그대로 범죄를 위해서, 재연은 처벌을 위해서 행해집니다. 디오니소스-그르누이와 예수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4. 디오니소스 폭로의 의의
디오니소스-그르누이를 향한 폭력은 단순히 먼 옛날 중세의 프랑스나 고대 그리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대에도 이런 희생양 신화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연예인들을 향한 테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연예인들은 단순히 그들이 누군가보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질투 섞인 공격을 받곤 합니다. 물론 진짜 잘못을 저지른 연예인들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대부분 그들이 저지른 잘못 이상의 심판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신공격이나 죽음을 요구하는 댓글 등 차마 허용하기 힘든 악플들이 그런 예이지요. 누구도 타인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선고를 내리며 쉽게 웃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왜 이런 폭력적인 디오니소스의 축전이 오늘날에도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현대를 가리켜 역사의 그 어떤 시대보다 평온하고 풍요로운 시대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도 현대인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열등감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죠. 이런 박탈감과 열등감들이 쌓일수록 사회는 그것을 해소한 분출구가 필요한 법인데 그 희생양이 바로 연예인 같은 특정한 소수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본 이야기에 따르면, 아마 예수가 자신의 희생을 통해 폭로하고자 했던 세상의 숨겨진 원리는 바로 이와 같은 ‘희생양 메커니즘’ 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했던 지라르는 자신의 저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디오니소스 신화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시대는 니체의 말에 많은 신뢰를 보내기 전에 “디오니소스, 그것은 곧 하데스와 같다”는, 우리의 뇌리를 때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디오니소스는 지옥과 같고, 사탄과 같고, 죽음과 같고, 린치와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가장 파괴적인 것에 들어 있는 폭력적 모방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
5. 마무리
오늘은 영화 향수를 통해 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수의 수난에 대해 다루어보았습니다. 신화나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는 부당한 폭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예수가 남긴 유명한 한 마디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마태복음5장43절~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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