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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클라쓰 Jul 06. 2020

영화 어벤저스의 빌런은 어벤저스다?

타노스는 정말 '나쁜 놈'일까?

혹시 슈퍼히어로 영화 좋아하시나요? 사실 슈퍼히어로를 영화가 이렇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것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닌데요.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한 인식을 처음 바꾼 영화로 많이들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를 꼽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한번 더 슈퍼 히어로 영화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는데요. 바로 마블 스튜디오가 이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대성공이었습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의 성공을 시작으로 ‘어벤저스’ 시리즈는 전 세계적인 대 흥행을 기록합니다.     


전 세계적 흥행에 성공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어벤저스 시리즈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어벤저스는 오락영화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웅 아이언맨도, 캡틴 아메리카도 영화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결코 평면적이지 않죠. 그런데 보통의 슈퍼히어로 영화보다 어벤저스는 그 ‘빌런’에 초점이 많이 맞춰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타노스’라는 미친 존재감의 빌런입니다.      


※ 영화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친 존재감의 '타노스'


어벤저스 3과 4의 감독인 루소 형제는 “인피니티 워는 타노스의 영화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요(기사).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특히 ‘어벤저스 3 : 인피티니 워’는 전체적으로 타노스를 위한, 타노스에 의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타노스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도대체 타노스의 어떤 면이 타노스라는 빌런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을까요? 오늘은 이 타노스의 사상을 따라가 보면서, 영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삶 속의 중요한 철학적 문제를 다뤄보고 싶습니다.      


인피니티 워는 타노스의 영화다!


먼저 철저하게 타노스의 관점에서 영화 속 세계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타노스는 자신이 살던 행성 ‘타이탄’이 많은 인구와 자원 부족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타노스는 당시 ‘타이탄’을 살릴 방법을 나름대로 제시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무작위로 행성의 생물 50%를 없애면 파멸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제안은 거절당했고, 결과적으로 타이탄은 멸망합니다. 그 이후 타노스는 우주의 전 생물의 보존을 위해는 우주 생물의 절반이 사라져야 한다는 과업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고 타노스는 그러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바로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는 일이죠. 보통 이런 모습은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히어로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는 이야기로 나오기 마련인데요. 영화 어벤저스의 특별한 점은 빌런인 타노스가 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인피니티 스톤을 찾는 과정은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과 인간들이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과정과도 겹쳐 보입니다. 다들 한 번쯤 그 이야기를 접해보셨을 ‘헤라클레스’를 보면 각종 시험을 받고 그 시험을 통과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자세히 보다 보면 타노스가 인피티니 스톤을 모으는 모습과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겹쳐 보이죠.


타노스는 그 어떤 등장인물들보다도 강인한 의지와 힘을 가지고 거침없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해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다 보면 타노스를 정말 ‘나쁜 놈’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타노스는 다른 빌런들과는 달리 개인적 야심이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생명의 보존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만 움직일 뿐이죠.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수양딸 “가모라”까지 희생시키면서도 자신의 대의를 위해 꿋꿋하게 움직입니다.



"어려운 일일수록, 강한 의지가 필요해" - 타노스, 타이탄에서의 전투 중에서

"오늘 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 타노스, 가모라를 희생시켜 소울스톤을 얻은 후 어벤저스와 결투 중에서



도대체 무엇이 이 존재를 그토록 개인적 야심도 없이 어떤 대의에 몰두하게 만든 것일까요? 그 철학적 바탕이 궁금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유명하나 사고 실험을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트롤리 딜레마(광차 문제)’라는 사고 실험입니다.     


여기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롤리(광차 : 광산에서 쓰이던 기차)가 달리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레일 위에는 5명의 사람이 있고, 기차가 이대로 달린다면 5명은 반드시 죽게 될 겁니다. 한 가지 그들이 살 방법은 레일 변환기로 기차의 방향을 바꾸는 것뿐이죠. 그런데 그 다른 레일 위에는 1명의 사람이 더 있습니다. 그 레버를 당겨 레일을 바꾸게 된다면 그 1명의 사람은 죽게 됩니다. 누군가 눈 딱 감고 레버만 당기면 5명의 귀한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명의 귀한 생명은 목숨을 잃게 되겠죠.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사실 타노스가 가정한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 타노스의 생각이긴 하지만 타노스가 우주 생명체들의 50%의 전멸이라는 레버를 당기지 않는다면 50%가 아닌 우주 전 생물의 100%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이 실험에 관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상이 있습니다. 바로 “공리주의”입니다.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에서 발달한 윤리 이론 중에 하나로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제러미 벤담(Jeremy Betham)’이 있습니다. 제러미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원칙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공리주의는 쉽게 말해 좋고 나쁨을 쾌락과 고통의 ‘양’을 통해 비교하고 쾌락의 양을 극대화하는 것이 옳다는 사상입니다. 어떤 행위의 옳음은 그 행위가 행복을 주는 정도만큼 비례한다는 것이죠.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1748.2.15 ~ 1832.6.6)


예를 들어 내가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를 부어 먹으면 행복도가 100이 오르는데 찍어 먹으면 200이 오른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러면 공리주의식으로는 찍먹은 부먹보다 “옳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죠. 즉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논리의 귀결은 ‘과정이 좀 나쁘더라도’ 심지어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과가 좋다면 그 수단을 허용해도 된다는 입장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결과주의’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트롤리 딜레마 실험의 경우도 1명을 죽여서 5명이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한 명의 상황과 입장을 떠나 공리주의적으로 접근하자면 ‘옳다는 겁니다’. 이런 공리주의적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바로 “타노스”의 사상이 탄생합니다.     


붓기 전에 물어보자


다시 타노스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지금까지 살펴본 트롤리 딜레마 문제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타노스가 보통 빌런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주 전 생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고, 누구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서서 그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타노스에게는 있는 겁니다.      



타노스 : 유주는 유한해. 자원도 그렇지. 이대로 가면, 아무도 못 살아남아. 바로잡아야 해.

가모라 : 당신이 어떻게 알아!

타노스 : 그걸 아는 건 나뿐이고, 행동할 의지를 가진 것도 나뿐이다.

- 타노스와 가모라의 대화중



위의 관점에 따라 타노스의 유명한 대사 “나는 필연이다.”라는 말을 이해해 보면, 온 우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50%의 생명을 없애는 일을 자신이 기꺼이 하겠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일, 내가 하겠다는 것이죠,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를 보다 보면 갑옷을 입고 다니던 타노스가 갑옷을 벗고 싸움에 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전쟁’을 좋아하던 타노스가 ‘철학자’적으로 변모했음을 나타내는 영화적 장치라고 합니다. 이처럼 타노스는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닌 나름 근거 있는 빌런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타노스를 방해하는 '어벤저스'가 타노스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빌런'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죠.



"나는 필연이다(I'm inevitable)." 

- 타노스



오늘은 영화 속 타노스의 이야기를 통해 공리주의적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선택에 있어서 공리주의적 선택을 할 때가 많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나에게 이득이 되거나, 나의 집단에 이득이 극대화되는 선택을 하는 경우들이 많죠. 그래서 타노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타노스의 관점이 이해가 되고, 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쨌든 우리는 타노스를 ‘영웅’이 아닌 ‘빌런’으로 인식합니다. 뭐라고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타노스의 관점에도 어떤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다음 시간에는 타노스의 반대편에 서서, 타노스가 가진 관점의 윤리적 한계와 함께 같은 사안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위 내용을 영상화하여 유튜브에 업로드한 것이 있습니다. 같이 보시면 더욱 재미있게 위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꾸벅)

https://youtu.be/5xKGjjHkE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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