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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클라쓰 Mar 31. 2021

영화 로리타와 소아성애를 옹호한 XX들

이것은 자유인가? 범죄인가?

영화 ‘롤리타’(한국 개봉명은 ‘로리타’이지만 원래 발음은 ‘롤리타’에 가깝습니다)는 지식인의 소아성애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인데요. 이미 작년에 한번 [영화 롤리타와 탐미주의]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탐미주의는 유미주의라고도 하는데요. ‘아름다움이 지상 최고의 가치다’ 뭐 이런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유미주의자들은 ‘아름다움’ 때문에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건데요. 그래서 유미주의자인 원작 소설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아마도 소아성애를 옹호했다기 보다는, 도덕주의자나 이상주의를 조롱하는 의미로 소아성애라는 소재를 다룬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법한 아주 유명한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소아성애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나보코프처럼 일종의 ‘어그로’를 끌려고 소아성애를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실제 소아성애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도 꽤나 진지하게요.     


“1977년 마츠네프는 일간지 〈라리베라시옹〉과 〈르몽드〉에 “어른과 미성년자의 성관계를 인정해달라”는 공식 성명을 냈는데, 이 성명에는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롤랑 바르트 등 69명의 당대 대표 지식인들도 서명했다.“     
- 2020.01.13 시사인 기사 중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롤랑바르트 등 이름만대도 알만한 철학계의 거목들이 소아성애를 옹호하는 공식성명을 냈다니, 이런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오늘은 그래서 이 사람들이 왜 저런 생각을 했을지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왼쪽부터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롤랑 바르트


이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보니 어린 아이였다.”      


실제 모 철학자가 강의 중 했던 멘트인데요. 소아성애를 옹호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소아성애가 변태적인 성도착이 아니라 사랑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사회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은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이런 주장은 볼 것도 없이 헛소리입니다. 문제는 실제로 험버트와 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버젓이 존재한다는 건데요. 그런데 충격적인 건 꽤나 배웠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소아성애를 저지르거나 옹호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앞서 본 것처럼 사르트르 같은 대단한 철학자들이 소아성애를 허용하라는 공식성명에 사인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이들의 주장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영화 롤리타 이야기의 구조를 분석해보려 합니다.      


롤리타의 이야기에 대한 여러 분석이 있지만 눈여겨볼만한 주장이 한 가지 있습니다. 롤리타는 ‘험버트’로 대표되는 ‘구세계(유럽)’의 문화가 ‘롤리타’로 대표되는 ‘신세계(미국)’의 문화를 동경하는 이야기라는 분석입니다. 다시 말하면 험버트는 유럽과 같은 구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롤리타는 미국이라는 신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사랑한 것은 이런 작가의 동경이 험버트라는 지식인 주인공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소리죠.      


영화 속 험버트와 롤리타


이걸 이해하려면 조금 더 작가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는 주로 영어로 작품을 출판했기에 영미권 작가로 분류되지만 실제 그의 조국은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아버지가 피살되고 유럽으로 망명했던 나보코프는 망명귀족의 신분으로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았습니다. 그런 나보코프에게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리던 ‘젊은 미국’은 매혹적으로 보였을 법 합니다. 이와 같은 나고코프의 시각이 ‘롤리타’라는 인물로 그려졌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작품 속 험버트 또한 프랑스, 즉 유럽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와 교수가 되면서 롤리타를 만나는 것으로 그려지죠.      


이런 작가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롤리타의 이야기를 분석해본다면 험버트의 사랑은 절대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보니 롤리타였다’가 아니라 ‘롤리타라서 사랑했다’가 되는 것이죠. 때 묻지 않은 미국이라서, 구세계가 지니지 못한 젊음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미국이 키워낸’ 롤리타라서 좋은 겁니다. 이와 같은 분석에 따르면, 험버트가 롤리타를 사랑하는 것은. 실제로는 신세계를 동경하는 자신의 욕망을 롤리타에게 덧씌워 사랑으로 포장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분석해보면, 험버트 자신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사실 그의 소아성애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지독한 이기심과 허영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위에서 언급한 공식성명 이야기의 실체를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 공식성명을 낸 사람은 프랑스의 작가 ‘가브리엘 마츠네프’라는 사람인데요. 실제로 이 사람은 15세 이하의 미성년자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이것을 자랑하듯 에세이를 썼다가, 최근 프랑스 당국에 의해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그러니까, ‘미성년자와의 사랑’이라는 건 사실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주장이었던 거죠. 포장은 ‘사랑’이라는 단어이지만, 속셈은 달랐던 겁니다. 이렇게 실체를 알고 나면 그 속에는 엄청난 이기심, 허영심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우리의 사랑을 막지 말아라!’라는 말은 일견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나는 어린아이와 성관계가 하고 싶다’는 욕구를 감추기 위한 훼이크에 불과한 겁니다.  


가브리엘 마츠네프와 소아성애를 소재로 쓴 에세이 '16세 이하'

    

소아성애를 범죄로 규정하는 이유는 ‘성’ 자체에 대해 아직 온전한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직 성 관념이 온전히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이 ‘사랑’을 해서 성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는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개소리인 거죠. 위의 마츠네프의 사례는 입에 담기도 짜증나는데요. 피해자 ‘바네사 스프링고라’라는 사람이 밝힌 바에 따르면, 14살에 ‘강제로’ 그에게 당했다는 겁니다. 진짜 만에 하나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오히려 그 대상을 지켜주려 해야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마츠네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인간치고 어린아이를 지켜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행동들을 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앞서 철학적 대가들이 소아성애를 옹호한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보니 어린 아이였다.”는 주장을 다시 살펴보시죠. 마치 이런 소아성애가 아름다운 것인양 포장하려고 하는 말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그들의 욕구와 이기심을 감추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성명에 사인을 한 이들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인데요. 이들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관습이나 상식을 무시하고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흐름의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인데요. 지나치게 선악에 대한 기준을 무시하고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안 클로드 앙브루아즈 랑뒤는 1월2일 라디오 ‘프랑스 퀼튀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몇몇 지식인이 지지하는 ‘아이들의 욕구에 대해 다시 고려해야 한다. 아이들도 욕구와 쾌락, 성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사회는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2020.01.13 시사인 기사 중


아이들도 성인들이 나누는 사랑을 즐길 욕구와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듣기에는 그럴 듯 해 보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규칙보다 이런 사랑과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말 하는 게 언뜻 듣기에는 수긍할만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영화 롤리타와 마츠네프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자유에도 거짓과 진짜가 있는 법입니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범했던 것은 사실 신세계에 대한 구세계의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저 성명을 내었던 마츠네프라는 사람의 말로를 한번 살펴봅시다. 이처럼 자유에는 진짜와 가짜가 있는 법입니다.     


오늘날은 어린이들에 대한 보호가 당연시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나라 망신 제대로 시켰던 ‘웰컴 투 비디오’ 사태도 한 예인데요. 관련해서 작년 한 해 해당 사이트를 운영한 운영자에 대해 법원에서 너무 가벼운 처절을 한 것 아니냐는 비난도 거셌습니다. 이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린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옳지 못하며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거죠. 앞서 말한 마츠네프도 프랑스에서 수사를 받고 있고 본인의 책들이 줄줄이 절판되는 등 참교육을 당하고 있는데요. 이처럼 우리는 지켜야할 것은 지키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코 자유라는 이름으로 침범해서는 안 될 영역도 있는 거죠.     


작년 한 해 우리를 분노케 했던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에 대한 판결


오늘은 소아성애라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다루어보았습니다. 사실은 소아성애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기만의 환상과 열등감이 반영된 결과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드렸습니다. 또 사랑과 자유에도 참과 거짓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누어보았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 하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사랑과 자유에 참과 거짓이 있다면 내가 느끼는 사랑과 자유가 진짜라고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요? 혹시 나도 무언가의 환상과 열등감에 취해 대상을 그릇되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요? 누군가를 비판하기를 넘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참조기사)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127

https://www.yna.co.kr/view/AKR20200130002100081

https://www.liberation.fr/checknews/2020/01/02/matzneff-les-signataires-d-une-petition-pro-pedophilie-de-1977-ont-ils-emis-des-regrets_1771174/



위 내용을 영상화하여 유튜브에 업로드하였습니다. 영상의 분위기와 함께 내용을 접하시면 더욱 느낌 있게 내용이 다가오실 것 같습니다. 영상을 보시고자 하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youtu.be/RBtg9LnGl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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