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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감독 Jan 18. 2022

<핵가족, 그리고 핵분열>


얼마 전에 지난 명절 연휴에 지금은 동네에 살지 않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에 반가운 친구가 있었어요. 중학교 1학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인데요. 이 친구는 이른 나이에 사회적으로 자리를 잘 잡아서 소위 잘 나가는 친구입니다. 그래도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다행이죠. 서울에 있을 때는 가깝다는 이유로 애써 찾아서 만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못 본지가 거의 2년이 되었더군요. 친구 어머님께서 낙상하셔서 어깨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친구가 보호자로 내려와서 연휴 동안 부산에 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게임 관련 회사에 임원으로 있습니다. 우리나라 게임 개발 세대의 1.5세대로 20~30대는 밤낮없이 일만 했는데 이른 40대에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항상 잘 꾸미고 다니는 친구가 고향 친구 보러 온다고 편하게 나왔더군요. 


"여전히 술은 안 먹지?"

눈치를 보니 뭔가 답답해 보이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 보였어요. 제가 먼저 쭉 물어봤죠. 회사는 괜찮은지, 가족은 어떤지, 어머님은 수술은 잘 됐는지, 제수씨는 잘 지내는지..


"아.. 진짜 그냥 좀 살던 대로 조용히 좀 살고 싶다. 알콩달콩 뭐 그런 거.. 그게 쉬운 거 같은데 왜 안 되냐.. "

"... 왜... 무슨 일인데?"

"쩝... 아니... 갑자기 작년부터... 더 이상 애 키우고 살림하는 거, 못 하겠데. 뭔 소리냐고 이게..."

" 네가 뭐 잘 못 했나?"

"아니.. 뭐 잘 못할 시간이나 있나.. 그렇잖아.. 나는 쭉 일을 하는 거고 업무상 출장도 많고... 그럼 뭐 어쩔 수 없이 엄마는 살림하는 거고.. 그걸 굳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냐고.. 참 답답하다.."


친구는 일찍 결혼했습니다. 26살에 해서 곧 첫 딸을 낳고 10년이 지나 둘째를 가지게 되었어요.  친구는 이야기가 시작되자 토하듯 말을 쏟아 냈어요.


"그럼... 지가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하던지... 그것도 아니고 굳이 말 안 해도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하고 그러는 거지 지는 그 나이에 명풍에 좋은 것은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보면서 말이야..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뭐가.. "

그랬습니다. 친구는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제수씨는 외제차에 적당한 미용 시술도 하고 명품에 멋지고 세련된 사모님이었어요.

"애들 공부시킨다고 제수씨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거 아이가? 서울에서 사교육 시키려면 돈도 돈이지만 엄마가 엄청 스트레스받는다더니만"

"그렇긴 하지.. 주변에 온통 잘 난 엄마들 밖에 없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지.. 그 동네 엄마들 SKY 나와서 다들 외국 유학파고 그런데 와이프는 그렇지 못하니까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네가 잘 알고 있네... 그럼 이야기 잘하고... "

친구는 제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쏟아냅니다.

"아.. 가끔 좀 못된 생각이지만 이런 생각도 한다. 


일단 제가 할 말을 좀 정리를 해야 했어요. 친구가 조금 가라앉길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내가 아이를 키우기로 한 것, 그전에 내가 얼마나 큰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이로 인해 그 꿈을 잠시 접고 있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 간다는 고통...


"사람은 인정받고 싶어 하잖아. 니도 그렇잖아.. 인정받으니까 자꾸 일하고 싶고 일도 재미나고 밤새도록 해도 피곤한지 모르고.. 그렇게 일해서 돈도 많이 벌고, 사장님, 회장님 소리 듣고 있으니까 그게 동기부여가 돼서 더 열심히 살고 있다가... 나도 인정받다가 졸지에 집구석에 들어앉아 있으니까 미치겠더라고..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몰라주는  것 같고.."

친구는 이 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고 있었어요.

친구는 미간에 주름이 생긴 채로 정지 화면처럼 저를 보고 있었어요.


"니는 어찌 보면 집에서 그동안 육아 걱정, 밥걱정 안 하고 일만 해서 인정받았잖아. 그게 네가 혼자서 잘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수씨가 인정받을 곳은 니 밖에 없다. 생각해봐라 70억 인구 중에 딱 한 사람밖에 없다.. "

친구가 깊게 한숨을 내뱉고 커피를 원샷하고 얼음을 으득으득 씹어 먹고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 내가 그걸 몰랐구나...."


솔직히, 저는 친구가 이렇게 빨리 인정할 줄을 몰랐어요. 자존심과 고집이 쌘 친구라서 자신의 실수를 쉽게 인정은 안 하는 친구였는데 순간 모든 걸 내려놓듯이 인정을 해 버리더군요. 친구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제수씨가 스스로 공부를 좀 해서 자존감을 올리는 것이 제일 좋겠죠.

서울 강남 바닥 부잣집 아줌마들 틈바구니, 사교육의 최고봉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모든 걸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제수씨는 이른 결혼으로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갱년기나 권태기 같은 것이 일찍 와서 더한 것일 수도 있지만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구분 없이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몰랐다고 했지... 그거 재수 씨한테 가서 고대로 이야기해라... 그동안 내가 몰랐다고."

"아..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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