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은 인류 역사에 각인이 되는 해가 될 것이다.
1918년~1920년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 이후로 아마도 최악의 바이러스 일 것이다. 코로나19.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스마트 폰에서 재난 문자는 계속 오고 있다. 나는 과거 에이즈, 에볼라, 사스 바이러스가 유행일 때도, 몇 년 전, 메르스까지 정말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받아들였다. 마치 역사 교과서에 실린 수백 년 전 역사 이야기 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선진국들은 그들이 언제 선진국이었나 싶을 정도로 신종 바이러스 앞에서 우왕좌왕했고 무너졌다. 사망자수만 따져 봐도 전쟁을 방불케 한다. 궁금하다. 앞으로 이런 대규모 재난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연 발생적이든, 어떤 인간의 광기 어린 행동이든 충분히 재발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미안하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한 번씩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에휴 나는 이제 다 살았는데 어째 살겠노.. 이 세상을’
그렇다. 우째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괜찮다. 최근에 이상기후다, 환경이 오염이다 해도 내가 앞으로 살 40~50년 정도는 무리 없이 버텨질 것이다. 표현을 좀 더 적나라게 해서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더러운 세상에 우리 애들을 위해 최소한의 방책은 세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한 명의 아빠로, 볼 품 없는 한 인간으로,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내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특히, 배움에 있어서 큰 환경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시사인 678호 2020. 9. 15일 자 <적나라하게 드러난 팬데믹 시대 교육 불평등> 글. 변진경 기자, 그래픽 최예린 기자> 기사를 읽게 되었다. 위의 기사를 참고해 쓴다.
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학생들의 삶은 공부를 위해서든, 놀기를 위해서든 미디어 사용 시간이 늘었다고 한다. 밖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활동은 줄고, 혼자서 미디어에 장시간 노출되어 혹은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의 미디어 노출이 심각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학습 목적으로 74.8%, 학습 외 목적으로 61.6% 더 오랫동안 스마트 기기를 사용했다. 학교 문을 닫으니 사교육 시간은 더 늘었다. 또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도 31.2%나 늘었다. 학생들은 양극단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교육을 받는 시간도 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도 늘었다면 줄어든 시간을 무엇인가. 문화활동, 산책, 운동이 줄었다.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저학년 39.1%는 한 학기 동안 한 번도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 코로나19 이후 학교생활 중 가장 힘든 부분을 물었을 때초등학교 저학년은 1순위로 친구관계를 꼽았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평가 및 과제하기, 학교 일정 따라 잡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비율이 높았다.
공교육이 문을 닫으면서 가정형편에 따른 차이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쾌적하고 좋은 환경에서 최신 장비로 학습하는 아이들과 좁은 공간에서 형제자매들과 부대끼며 진도를 나가는 아이들의 격차가 컸다. 밖에도 나가지를 못하는데 온라인 수업이 끝나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여기서 스스로 시간 활용을 해야 하는데 미디어에 노출된 아이들은 그냥 계속 미디어를 본다. 외벌이를 하는 집은 부모와 집에 함께 장시간 있으면서 대화 시간도 많아지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 가정형편이 괜찮은 집은 오히려 아이들의 정신건강이 좋아지는 쪽도 있다고 한다. 반면, 맞벌이를 하는 집 중에 저소득층 아이들은 우울함을 자주 호소한 다 고한다. 이와 같은 감염병에 대비해 학교정책이나 입시제도도 정비가 되어야 한다.
외벌이 집에서 중산층 가정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매일매일 하루 종일 담임, 조리사, 전산실 직원, 그리고 학생주임이다. 여기서 주는 불안함이 엄청난 고통이다. 잘 못하는 모든 것이 엄마 탓이 될까 봐 두렵다. 맞벌이를 꼭 해야만 하는 가정에서는 사교육비가 더 든다. 공부를 위한 것도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집에 두고 밖에 나가 있는 부모들은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에 여러 방면으로 아이가 뒤쳐질 까 봐 태권도, 미술, 음악 관련 학원 등록도 상승하고 있다.
이렇게 기사는 마무리가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번과 같은 팬데믹이 다시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 상황을 무사히 잘 이겨 낸다면, 이번 사태를 경험으로 앞으로는 좀 더 잘 극복할 수 있겠지만 바이러스는 인종, 종교, 국가, 대륙을 차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역시나 아이들의 교육은 활자와 친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팬데믹을 핑계로 미디어에 계속 노출시키면 앞에서 소개한 ‘소셜 딜레마’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 활자는 대표적으로 책을 말하는 것이지만, 비대면의 시대에 도서관을 다니거나 다른 사람과 접촉이 된 책을 함께 사용한다는 것도 사실 힘들다.
여기 내 생각은 이렇다. 하나의 큰 도서관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을 분산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 단위로 작은 도서관들이 더 많이 생겨서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 않게 해야 한다. 활자에 익숙해지려면 어쩔 수 없이 실행해야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 부모가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줘야 하고 읽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외벌이든, 맞벌이든 부모가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 해서라도 읽어 줘야 한다. 아이가 우연히 책을 잡았을 때, 설거지하던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달려가서 읽어 주어야 한다. 국가는 지금과 같은 입시제도가 아니라 학생들,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시제도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우리 애들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잘 따라와 줄지 모르겠다. 우선은 내가 한 권이라도 더 읽는 모습을 애들 앞에 보이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 후에는 애들에게 맡긴다. 4차 산업 혁명이 오나, 팬데믹이 오나 결국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은 더욱 명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