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고통도 뼈를 깎는 아픔도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라 우리가 밀려나면 모두가 스러져 최후의 5분에 승리는 달렸다.' 생도 시절 금요일마다 학교 한 바퀴 단체 뜀걸음 5km 코스의 마지막 학교 정문부터 생도대 입구까지 스퍼트를 올리며 목이 터져라 불렀던 군가였다. 학교 정문에서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와중에 최후의 5분을 부르며 내 다리가 뛰는 건지 어딘가 돌은 것 같은 이 에너지의 제대 속에 떠밀려 그렇게 뛰쳐 올라간 건지 허벅지를 그렇게 들며 뛰어 내달리는 마지막 순간의 노래. 1초가 1분 같고 도대체 빨라지는 발박자 속에 군가는 끝나가는데 언제 도착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순간. 젖 먹던 힘이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몸을 뒤틀어 어딘가에 있던 힘을 짜내던 그 순간. 그리고 완주하던 그 순간들 고통과 기쁨과 뿌듯함과 괴로움이 된통 뒤섞인 채 새빨개진 내 얼굴을 보던 그 시간들. 금요일 오후 그 시간이면 빨간 해가 뉘엿거리는 하늘을 보며 부르던 생도대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경하게 남아있는 감각들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과 함께 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남편의 발령지 또한 참 많이 노력했지만 결국엔 먼 곳으로 정해졌다. 남편의 복직 이전에 아이들과의 이사를 마무리 짓고 생활을 안정 지어 남편은 남편의 세상으로 나는 나의 학업과 아이들의 양육에 집중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각각 남편 와 가족들이 헤어지고 각자의 직장과, 학업 그리고 어린 두 아이의 양육까지 도움 없이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우려와 걱정이 앞서고, 또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아이들이 어린 이 몇 해만 잘 버티면 다 잘 풀릴 것이니 잘 되었다는 마음도 든다. 마음이 어렵지만 어찌 보면 홀로 아이들 양육하는 것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해외에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을 길 가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여러 현실적 어려움이 산재하지만 이사 날짜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있다. 고요한 일주일을 기다리며 마치 최후의 5분을 부르며 마지막 도착 지점으로 내달리던 생도 때가 많이 생각난다. 많은 이사를 해보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사는 처음이라 여러 걱정이 앞서기도 하고, 아마 적응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겠지. 그러면서도 매주 기차역을 오고 가며 아이들과 생이별하고 남편의 홀로 육아에 미안함만 남기는 일은 이제 종료가 된다는 마음에 홀가분하다. 생각보다 4년 간의 서울 살이가 너무 정들었는지 떠나려니 시원 섭섭하다. 빨리 이사하고 싶지만 하고 싶지 않아.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하겠지만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딘가 이렇게 꼬이기만 해야 하는 걸까. 모든 것이 뒤엉키는 이 감정을 어찌할까.
내 의지로 처음 정 붙이며 생활한 교회를 떠나려니 가장 아쉬울 뿐이다. 따스하게 현실적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권사님께서 고난의 어려움이 압도할 때 그저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기도하며 구하라 하셨다. 인간의 뜻으로 되지 않는 이 세상에 그저 순종하며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길. 오늘 교회에서 이별 인사를 하며 너무 울어 이게 세상 그렇게 슬픈 일도 아닌데 유난스럽게 터져버린 나의 눈물샘이 야속하다. 이미 내가 넘을 산 뒤에 보이는 또 다른 산맥들을 본 것 같은 나날들이다. 뭐 그렇다고 안 넘을 수는 없잖아.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남편과 우리 아가들 데리고 걸어가야지. 가끔 울 수도 그리고 어떤 날은 깔깔대며 다닐 수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