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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 Oct 09. 2020

안일한 불의의 길 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사관생도 시절은 너무 바쁘고 피곤했다.

겨울 아침의 차가운 아스팔트 냄새를 맡으면 생도 시절이 생각난다


0630이면 기상나팔 소리에 눈을 떠, 부랴부랴 근무복을 챙겨 입는다. 잠은 덜 깼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상급생도들이 정해놓은 시간까지 여생도 특별구역으로 뛰어 올라가 청소를 시작해야 했다. 호실 동기생들과 화장실, 세면장, 샤워장을 1명씩 분담하여 청소를 하고 있으면, 여유가 넘치던 부분대장 생도가 들어와 빨래를 챙기며 소소하게 청소를 지적했다. 그중에서도 세면장 청소가 가장 힘들었는데, 사람들이 거울 앞에 모여 도망갈 곳이 없었으며, 머리카락과 물때가 가장 눈에 잘 띄어 지적받기 쉬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겨우 마치고 다시 호실로 뛰어내려와 근무복의 뒷주름을 다시금 잡고, 근무모를 머리에 걸치고 아침 점호에 참석하기 위해 1층으로 뛰어 내려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끄럽게 뛰는 것도 안되어서 아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었던 것 같다. 나의 분대가 위치한 곳에 분대원들과 맞춰 서며, 아직 눈곱도 떼지 않은 채 나오는 상급생도들에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를 외치며 생도대의 아침을 시작했다.


당직 사관 생도의 흰 수갑과, 짤랑거리는 칼 소리에 아침 점호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매일 사관생도 신조와 육군 복무 신조를 외쳤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명예와 신의 속에 살아야 하며, 안일한 불의의 길 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겠다며 다짐 아닌 다짐을 크게 외쳤었다. 비록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너무 시려 빨리 점호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3번째 안일한 불의의 길을 외칠 때에는 속사포 랩이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나의 꿈은 군인이 아니었다. 군인의 딸이었고, 군인이었으며, 현재는 군인의 아내로 살고 있지만 내 꿈은 군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약 10년 간의 군복 생활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고,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며, 군인이 되었기에 군복을 입고 있는 이유와, 목표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닌 것 아니었나 보다. 정확하게는 사관생도 4년, 장교 5년치열한 고군분투를 마치고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군인 시절이 매우 자랑스러우며, 지금도 군 복무를 했다는 사실과, 남다른 경험과 국가관에 자부심을 느낀다.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라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조직에서만큼은 정의롭고 옳은 길을 택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곳이니 얼마나 건강하고도 안전한 곳인가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머리를 굴리며 수 쓰는 것을 잘 못하던 나에게 나름 안심이 되는 조직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5년의 장교 생활도 멋지게 하고 싶었었다.


재수생 시절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었다. 집에서 뉴스를 보며 아빠와 함께 밥을 먹던 앞 동 아저씨(엄연히 말하자면 멋진 해병 중사)가 내 피가 끓는다며, 당장에 명령만 내리면 출동해야 한다며 전의를 불태우셨다. 그 옆에서 바라보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착한 이모와, 아이가 이렇게 있는데 죽을 수도 있는 저곳에 몸을 던지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생각일까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해가 간다. 나 또한 만약 국가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의 능력과 경험하고 배운 것을 펼칠 것이다.


전방에서 군 복무하던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국방에 매진하며 헌신하던 것을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았다. 자의던 타의던 군인이라는 이유로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에 경의를 다시 표하며, 군에서도, 민간에서도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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