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를 부르는 상냥한 소리
지금 세대들은 알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 TV에서 방영하던 말괄량이 삐삐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이 단어만 들으면 붉은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가진 왈가닥 소녀의 이미지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나는 동네에서 그런 이미지를 가진 아이였다. 내리쬐는 햇볕에 그대로 드러내며 놀러 다녔던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했고, 머리는 풀고 다니는 것보다 활동하기 편하게 항상 묶고 다녔으며- 동네 꼬마들을 이끌고 다니는 골목대장 역할을 도맡아 했다. 무엇이든 내가 결정했고,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내 결정에 따라와 주었다. 그땐 그들을 데리고 동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하루는 땅따먹기, 다음날은 고무줄놀이, 또 다른 날은 주차되어 있던 트럭에서 술래잡기 등 놀이의 종류가 끝이 없도록 매번 다른 형태의 하루를 마무리 짓곤 했다.
물론 날마다 좋은 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친구와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놀다가 언쟁이 붙는다던지, 나에게 먼저 공격을 시작한다던지, 잘못이 있는 상대방에게서 사과를 듣지 못한 경우 등과 같은 상황 속에서 나도 똑같이 그들에게 되받아 공격했고, 성별이 같든 다르든 한 번 붙게 되면 지는 걸 결단코 싫어했던 성격인지라 싸움의 끝은 항상 상대방의 울음이 터져 나와야지만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마무리였다. 진짜 마무리는 항상 싸움에서 진 친구네 엄마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고, 수화기 너머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엄마는 나의 손 혹은 팔을 붙잡고 친구네 집에 방문해서 머리 숙여 사과드리는 일이었다. 엄마는 이런 나의 괄괄한 성격 때문에 자칫 나와 친구들 사이가 멀어질까 봐 속상해하셨지만 아빠는 달랐다. 아빠도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던 분이어서 그랬던지 친구들과의 다툼에서 항상 이기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고, 오히려 나로 인해 다친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 치료비를 묵묵히 내어줄 뿐이었다. 엄마에게 전해 들었던 그 날의 뒷 이야기로는, 아빠는 딸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속으로 무척이나 뿌듯해하셨다고 한다.(반면 내 동생은 매번 친구들과의 싸움에서 맞고 들어오기 일쑤여서 아빠한테 무지 많이 혼났던 기억이..)
한 번은 매일 다툼이 끊이지 않던 우리 남매에게서 벌어진 일도 있었다. 부모님이 장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근처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동생은 그네를 타고 있었고, 나는 미끄럼틀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로 추정되는 무리가 와서 자기네 놀이터니깐 그네에서 비켜라고 동생에게 위협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순간 평소엔 사이가 좋지 않던 남동생이었지만 누군가 내 가족을 괴롭히는 건 참지 못했고, 발끈한 나머지 내 동생 편을 들어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서로 험한 언쟁이 오가고 분이 안 풀리는 상황에서 주먹 다툼까지 이어졌다. 당시 나는 추웠던 날씨 탓에 동생의 두툼한 솜 조끼를 안에 입고 그 위에 두꺼운 코트를 걸친 상황이었는데 상대방의 주먹이 와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내가 공격할 때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감정을 그대로 실어 주먹으로 힘껏 때리고 때렸던 부위에다 연속으로 공격을 가했다. 나의 공격을 받았던 이름도 모를 그 녀석은 꽤나 아팠던지 눈물을 보이며 계속 날 쳤지만 난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다시 공격을 이어갔다. 곁에서 지켜보던 동생도 나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놀이터에 있던 커다란 돌덩이를 던졌는데 잘못 겨냥해서 날 맞출 뻔했지만 다행히 돌은 비켜갔다. 결국은 멀리 계시던 아빠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싸움을 말리러 놀이터로 오는 과정에서 동생을 괴롭히던 무리들이 어른을 무서워했던 건지 제각각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말괄량이 삐삐는 무미건조한 생활에서 벗어나 나날이 꿈과 모험의 세계로 친구들과 함께 경험해 간다. 그런 삐삐처럼 나 역시도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생활했던 그날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내게도 그 시간들이 참 즐겁고 행복했던 때였던 듯하다. 하지만 서른 중반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때처럼 매일매일 새로운 걸 하거나 즐겁게 살고 있지는 않다. 그저 도시 속 평범한 어른들이 그렇듯 업무가 입력된 기계처럼 똑같은 일상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삶을 사는 어른들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나랑 똑같이 비슷한 하루를 반복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삐삐와 같이 다양한 하루로 시간을 채워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삶을 살면 재미가 없다고 나의 어릴 적 삐삐가 외치는 듯하다. 다시 내 안의 삐삐를 바깥으로 소환할 때가 온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