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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Sep 20. 2020

부산

저마다 다른 의미

80년대 중반 무더운 여름. 그중에서도 가장 더웠던 중복 그쯤, 

부산 초량이라는 작은 동네의 한 산부인과에서 크나큰 울음소리와 함께 나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태동이 힘차서 아들 같았더랬다. 근데 태어나고 보니 딸. 

그 시대에도 딸보다는 아들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더 선호하던 시대였기에 엄마는 내심 살짝 실망을 했었고, 아빠는 일 때문에 곁에서 출산을 돕진 못했지만 전화상으로 받았던 연락에 자신의 첫 핏줄이 태어나 정말 좋아하셨다고 한다. 


전라도가 친정이었던 엄마의 곁에는 멀리 사셨던 외할머니 대신 아빠의 첫째 누나인 고모가 계셨고, 갓 태어난 나를 속싸개로 감싸 안으며 

영판 경희(아빠 이름)네~ 경희~


하며 아빠를 쏙 빼닮은 딸임을 엄마에게 알려주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자신의 막내 동생이 첫 자식을 낳으니 이 고모의 눈에서는 핏덩이 친조카가 얼마나 이뻐 보였을까. 태어난 후 나는 부모님의 사랑만큼이나 아빠의 3명의 누이, 즉 고모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고 자라났다. 고모들의 자녀들은 이미 다 큰 성인이 되거나 질풍노도 사춘기가 온 상황이어서 그랬는지 백일이며 돌이며 이 막내둥이 조카에게 입을 것, 먹을 것 아낌없이 보내주며 애정을 쏟아주었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기에 첫째 자녀였던 나를 키우는 게 더 힘들었지만 그런 형님들의 조카 사랑 덕분에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했다. 


아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품는 딸바보였지만 무뚝뚝의 대명사 경상도 사나이인지라 크게 내색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업무가 많아 늦은 밤 퇴근할 때나 회식을 하고 술에 취해 들어올 때에도 잠든 나를 눈에 꼭 담고 잠들 준비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집 근처엔 작은 슈퍼가 있었는데 내가 2~3살쯤 아장아장 걸을 때쯤 슈퍼에 들어가서는 계산을 하지 않고 간식을 그냥 들고나가는 때가 많이 있었다고 했다.(아기였던 나는 본능에 충실해 먹고 싶었던 간식을 가지고 나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엄마는 그런 행동에 걱정이 많았지만 다들 동네에서 얼굴보며 인사하는 사이였던 슈퍼 주인분도 우리를 잘 알고 있었고, 아빠가 퇴근할 쯤이면 슈퍼에 들러 우리 딸이 오늘 얼마나 들고 갔냐며- 내가 들고 갔던 간식의 금액을 다 계산하고 가셨다고 한다. 지금의 시대라면 경찰 부르고, 서로 얼굴 붉히고 싸울 법도 한 일이었겠지만 80~90년 당시엔 아기의 행동에 대한 관대함(?)이 있었고, 이웃 간의 친목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아빠는 사진 찍기를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집 안에서의 일상을 찍는다던지, 아님 어린이날이나 아빠의 휴일이 될 때면 온 가족 모두 밖으로 나가 소풍을 참 많이 다니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기였을 때 사진을 보면 포대기 속 엄마의 등에 안겨 낙타 앞에서 찍힌 사진이라던지, 엄마랑 도시락을 펴 놓고 먹는 모습, 초콜릿 우유를 들고 먹는 모습 등 거의 파파라치 같은 아빠의 순간포착 샷으로 나의 어릴 적 앨범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엄마가 싸주는 김밥, 좋아하는 장소는 놀이동산과 동물원이라는 점이다.


나에게 부산은 태어난 곳이자 가족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한 때는 이런 부산이라는 출생지가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산은 바다가 먼저 떠오르고, 여행 가고 싶어지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듣고 자랐던 부산 특유의 억양과 리듬이 마음에 들지 않아 표준 발음과 리듬을 구사하는 아나운서 스터디를 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할 만큼 내 말소리의 억양이 너무도 싫었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상대방이 내가 말하는 어투를 보고는 부산 출신임을 바로 알아본 적도 참 많았었고, 그런 상황들마다 난 부산 사람이라는 게 창피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서울 사람들의 세련된 말투를 동경해서였던지 또는 티브이에서 나와서 표준어를 구사하며 연기하는 드라마 캐릭터들이 되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감정은 30대 초반이 돼서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부산사람 티 나지 않게 하려고 표준어를 모방한 말투를 어색하게 쓸수록 나의 출생지는 사람들에게 더 확실히 각인되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이상하고 불편했던 나의 생각과 말투의 고집은 내려놓게 되었다. 


부산은 내가 태어나고부터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가족들과의 추억도 가득 쌓았던 곳인데 왜 그토록 미워했던 시간도 길었던지.. 지금은 부산이 아닌 경기도에서 터를 잡고 생활하며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지만 지금 자라나고 있는 내 아이에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내 배우자에게도 나의 추억이 가득 있는 부산의 기억 명소들을 찾아가 소개하고 싶다. 엄마가 자라난 곳이 여기였고, 그 지역 말투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 내가 사랑하는 지역이 여기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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