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lla Oct 04. 2020

방황

사춘기 아닌 사춘기

누구나에게 다 찾아오는 사춘기는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때의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가족의 영향으로 인해 나 스스로 방황했던 기억은 있다. 그림에 대한 꿈이 있었던 지난날을 읊었을 무렵, 부모님의 반대로 미술학원에 다니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내 마음엔 좌절과 상실감이 컸었고,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실망이 가득했던 때였다. 그 때문에 부모님과 한 때는 말을 하지 않았던 순간이 꽤 지속되었던 듯하다. 얼굴을 마주쳐도 서로 말도 안 하고, 밥을 먹어도 침묵 속에서 그냥 의미 없이 목 안으로 삼키던 그 순간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진로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부모님의 반대 의견과 함께 이런 상황이 되고 나니 서로가 서로에게 서운함이 생겨 더 그랬을 것이다. 수능 전날까지도 부모-자식 간에는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게 나의 첫 고집이자 아집이었고, 방황이자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렇다면 나의 미래에 대한 목표는 다시 설정해야 했다. 미대를 진학하기 힘들다면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당시엔 대학교 원서를 넣을 때 3번의 기회를 선택해서 지원할 수가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표준어로 구사하며 전달하는 아나운서는 어떨까 하는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원서 쓰기는 1 지망으로 일단 수능을 치고 나서 산정된 내 점수로 무난히 합격할 거 같았던 대학교 내 신문방송학과, 2 지망으로는 취업을 더 우선시할 거 같았던 전문대학 내의 신문방송학과, 마지막 3 지망으로는 고등학교 때 잠깐 배웠던 프랑스어를 전공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지방에 있는 국립대 프랑스어학과를 지원하게 되었다.(여긴 합격되어도 절대 가지 않을 생각으로 그냥 내지르듯이 지원했던 3 지망이었다.) 지원 결과는 셋 다 합격. 1 지망으로 당연히 갈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입학통지서를 보던 부모님은 신문방송학과 2곳 다 (방송 관련 장비 유지비 때문인 지는 모르겠지만..) 수업료가 너무나 비쌌고, 그에 반해 국립대 프랑스어학과는 그 2곳의 수업료보다 1/5 정도 수준의 금액으로 더 저렴하고 입학장학금까지 준다는 소식에 부모님은 두 말 않고 지방 국립대로 입학을 결정했다. 이렇게 두 번째 꿈(아나운서)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꿈으로 갈 길도 막막해지고, 삶의 방향도 잃어버린 나는 학생 신분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었기에 부모님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여야 했고,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아예 떨어져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집과 학교의 거리가 약 3시간 정도 걸리던 지방이었기 때문에 집에서의 통학은 힘들다고 생각했고 그 대학교 주변으로 내가 생활해야 할 방을 알아보아야 했다. 직접 밥을 해 먹어야 하는 자취방이냐 밥이 제공되는 하숙집이냐 고민하던 중, 부모님은 그래도 삼시 세 끼는 챙겨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하숙집 계약을 진행해 주셨다. 그리하여 나의 첫 독립생활이 대학생을 맞이하는 기점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나와 내 가족들과 떨어져 산다고 해서 딱히 슬프거나 무섭거나 하진 않았지만 엄마는 엄마의 첫 자식이었던 내가 가족의 품을 떠난다는 사실에 정말 많이 슬펐고, 두려워했으며, 또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나의 방황은 대학생활에서도 지속되었다. 어리숙한 생각으로 결정했던 3 지망이었기에 전공 공부도 당연히 나와는 맞지 않아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학기마다 받는 성적도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중하위권이었다. 학과 활동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더 열정을 쏟았고, 전공 학과 친구들보다 단과대 속 여러 학과에서 모인 동아리 친구들과 더 우애를 다졌다. 그렇게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지냈다. 1학기가 끝나고 운이 좋게도 교내 기숙사를 들어가게 되어 하숙집을 나오게 되었을 땐 하숙집 비용보다 조금은 더 저렴해져서 경제적 부담이 덜해질 부모님이 떠올랐다. 학기 초반에는 주말이면 매주 부산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중엔 그마저도 대학교 친구들과 시간 보내는 게 더 즐거워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없을 땐 기숙사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침대에 누워 다시 내 삶에 대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부모님 말씀처럼 '성적은 보통으로 유지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게 맞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해보았다. 결론은 두 길이 다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그냥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대학을 자퇴하고 나와 '홀로 상경해서 옷 장사나 해 볼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해 보았다. 이런 고민을 할수록 자꾸 떠오르는 건 고등학교 때 꿈꿨던 '그림'이었고, 그것이 몹시도 간절해질 뿐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방황을 끝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림에 대한 부모님의 생각은 여전히 반대였고, 꿈을 이루려고 한다면 온전히 나 혼자서 준비해야 했다. 마침 교내에 그림 관련 학과가 있었고, 그 학과로 전과를 하려면 실기시험이 필요한 걸 학교 공지사항으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기시험은 그 순간에도 필요했고,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나는 미술학원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선적으로 의(衣), 식(食), 주(住)가 해결되어야 했기에 곰곰이 계획을 짜보았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다시 자취방을 구해야 했는데 이 부분은 같이 살기로 한 선배 언니네에서 1년 치 월세를 미리 다 주는 형식으로 계약이 완료된 상태라 집에 대한 걱정은 덜었다. 옷이야 부산 집에 사계절 대비 옷들이 있었기에 문제 될 게 없었고, 먹을거리는 부모님이 매달 용돈 형식으로 주는 생활비에서 지출해야 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상황이었지만 전화 한 통으로 문제가 생겨버렸다. 부모님께 미술 관련 학과로 전과하기 위해서 휴학하겠다고 말씀드리자마자 아빠는 엄청 화를 냈고, 앞으로의 생활비 지원은 없고, 혼자 알아서 준비해 보아라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빠의 입장은 이랬다. 휴학을 할 생각이었으면 다음 학기에 지낼 방의 1년 치 월세를 미리 낼 필요도 없었으며 지방보다는 부산 집으로 올라와서 편하게 미술학원 다니면 되지 않았겠느냐며- 아빠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말씀드린 내 입장에선 아빠와의 타이밍을 맞춰가며 진행되지 않다는 걸 아빠가 알아주지 않음에 서운하고 또 미안했다. 그렇게 가족들과의 두 번째 단절이 찾아왔다..


휴학 후 나의 생활은 낮 시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미술학원 수업료를 벌었으며, 밤 시간엔 미술학원에서 기초 교육과 실기 시험을 위한 기법을 배웠다. 원장 선생님도 이런 내 사정을 알고 수업료도 성인보다 학생 기준으로 책정하여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도움을 주셨다. 아르바이트비로는 생활비와 수업료 내고 나면 빠듯했기에 집으로 가는 차비도 아낄 겸 집에서 학원까지의 3시간가량(왕복)을 걸어 다녔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실기시험을 치를 정도의 솜씨가 될 무렵 복학을 하게 되었고, 전과 시험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그 해에는 시험을 치르지 않겠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지 소식을 믿을 수 없어 관련 학과 사무실로 찾아가 다시 되물었을 때에도 조교는 시험을 형식적으로는 볼 수 있으나 전과 학생을 뽑을 계획은 없다는 답변에 사무실 나오는 길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 허망했다..


그동안 가르쳐 주었던 미술학원 선생님들에게는 뭐라 설명할 것이며, 부모님에게는 뭐라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학원에 가서 말씀드리니 선생님이 기왕 이렇게 된 거 준비한 게 아까우니까 부산에 있는 집 근처 학교 내 미술 관련 학과로 편입이라도 해 보자며 제안해 주었다. 그 시기가 편입 지원서 내는 기간이기도 했고, 배웠던 기법을 쓸 수 있는 실기시험이 있어서 한 번 해보자 결정하고는 준비에 착수했다. 2곳을 지원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원을 뽑는 학교의 시각디자인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더 이상 멀리 딸을 두지 않게 되었단 소식에 좋아했고, 단절되었던 관계는 다시 회복되며 가까워졌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빠는 그렇게 혼자 준비한 딸에 대해 굉장히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마음속에서 눈보라 회오리가 휘몰아치는 겨울 같았던 방황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의 산증인이 되었고, 내 생에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던 동시에 가장 기뻤던 시간이었다. 스스로 겪은 최초의 성취감이었으며, 주어진 삶에 대한 어려움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지금도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이때의 기억이 진통제가 되어 이겨나가게 할 원동력이 되는 고마운 시간들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