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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Oct 11. 2020

직장인

변덕스런 직장 분투기

나의 첫 회사는 사장님, 실장님, 나 이렇게 셋으로 구성된 단출하고 작은 곳이었다. 내가 막내를 맡고 있고, 회사에서 유일한 여자 사원이었기 때문에 나름 배려도 많이 받았던 고마운 회사였다. 예를 들면 홀로 자취생활을 하는 나를 위해 사장님의 배려로 사모님이 밑반찬을 싸다준 일이 있었다. 받으면서 감사함을 느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던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보내주신 반찬은 맛있게 잘 먹었지만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거절 아닌 거절을 했었다. 그때 사장님은 우스갯소리로 사모님께 "사모님 반찬이 맛이 없어서 못 먹겠더라"라고 전달하겠다 하셔서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 손사래 치던 일도 생각이 난다. 주로 업무는 인쇄(카탈로그, 브로셔) 쪽이었고, 실장님이 담당 메인 작업자, 나는 실장님 곁에서 보조역할을 하는 서브 작업자였다.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달마다 맡는 업무는 같았고, 어쩌다 한 번씩 사장님이 가져오는 새로운 일을 받게 된 날에는 실장님의 작업을 곁에서 배우곤 했다. 3년간의 시간 동안 매일 같은 업무로 진행하던 나는 삶의 단조로움을 느꼈었고, 이대로 가다간 나도 회사도 매너리즘에 잠식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덜컥 생기게 되었다. 퇴사하겠다 의견을 내었을 땐 회사에서도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 붙잡았지만, 회사와 나 둘 다 생각했을 때도 이 편이 낫겠다 싶어 그렇게 첫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첫 백수가 되었을 때, 시청에서 주관하는 청년취업캠프를 들으며 면접, 이력서 작성 등 취업에 관련된 정보를 얻으며 사회 준비생으로 정착해 갈 때쯤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 디자인 워크숍 교육생을 뽑는단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등록한 후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생산자(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 기준에서 사용자(서비스를 받는 주체)로 기준을 넘어가는 디자인이 해외에서는 이미 정착하고 중점적으로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던 반면 한국에서는 이론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 막 병아리가 알에서 깨고 나오듯이 조금씩 확장되던 시기를 타면서 그에 맞는 관련 교육을 열게 된 거라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4개월간의 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배우며 제공하는 입장이었던 나도 조금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 뼘 더 넓어지는 경험을 얻었고, 수료과정이 끝나갈 때 우연히도 진흥원에서 주최하는 인턴십 공고 기간과 겹쳐져서 그동안 배웠던 교육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업체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전문 디자인 회사는 아니었지만 IT업체 속 디자인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 인원을 모집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보았고, 드디어 면접을 보게 되었다. 진흥원과 업체 관련 담당자 포함 총 12~15명 정도의 면접관과 나 포함해서 5명의 면접자가 한 공간에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본 면접장 상황과는 달리 면접관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아 나의 긴장감은 그만큼 더 배가 되었다. 면접 시작 전에 액상으로 된 우황청심환을 먹었는데도 약은 몸에서 듣지 않고 박동수는 평상 시보다 더 심하게 요동치는 거 같았다. 업무 관련 질문이 오고 갔고, 내 차례 답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때 너무 떨려서였을까.. 준비해두었던 답변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암기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다 결국은 시간 관계상 답변을 끊자 마음속으로는 울컥해버렸다. 면접을 마치고 모든 답변을 열의 있게 내놓지 못한 점이 걸려 아무래도 낙방한 거 같은 느낌에 속상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기도 많이 울었다.. 면접 결과 발표날, 기적과도 같이 5명 중 내가 뽑혔단 소식에 하늘에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두 번째 회사는 강남구에 위치한 200명 남짓 넘은 일반 IT회사였고, 지하철 역에서 내리면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위치의 회사였다. 내가 들어간 소속 팀은 디자인 관련 직속 상사들이 많았고, 다들 디지털 디자인(웹, 모바일)에 더 능숙한 선배들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이전 회사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업무들이라 처음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주말마다 관련 교육을 따로 수강하기도 했고, 책이나 인터넷으로도 관련 정보를 많이 읽어보았던 때이기도 했다. 선배들은 내가 이전 회사의 경력인 3년 차로 입사한 걸로 알고 있지만 이전 경력은 인쇄 쪽이었기에 디지털 디자인과는 조금 다른 분야인 걸 인지하지 못했다. IT회사에서 필요한 나의 실력은 0년 차 신입이었고, 교육 과정에서 배운 이론이 전부였다. 실전인 회사 업무에서 원활하지 못했던 나는 선배들에게 나의 실력에 대한 아쉬움과 질책을 매일 들어야 했다.(부족한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고, 이게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다.) 파티션이 배치되어 있는 오픈된 사무실에서 선배들이 나에게 하는 소리는 다른 팀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였고, 지나가는 다른 팀원들의 힘내라는 응원도 자주 받았었다. 매번 꾸중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속 부담이 더해졌고, 관련 교육 활동도 더해지면서 몸을 혹사시켰다. 이후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서서히 스며드는 부정적인 반응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몸 안에 염증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에게 자주 화를 내는 상황도 있었으며, 주말만 되면 무기력함과 멍해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집 밖으로 나오는 걸 엄청 좋아하는 성향인데도 그 시기엔 방문에서 나가는 것도 싫었다. 넋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 홀로 있는 방 안에서 울고 있었다. 직장생활, 업무로부터의 번아웃,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우울증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병들겠구나 싶어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팀장님에게 퇴사 의사를 알렸고, 팀장님도 그런 내 의견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컵을 들고 있던 팀장님의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보았다..


2년 동안 일했던 두 번째 회사도 떠났다. 떠나기 전 선배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과했다는 걸 인정하고 나 다음에 들어올 팀원에게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회사 복지혜택도 나쁘지 않았던 회사여서 그랬던지 주변에서 퇴사를 많이 말렸었다. 고민할 생각도 없었다. 자존감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디자인 업무를 하지 못할 거 같았다. 같은 팀원, 팀장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실력이라 걸 예상하기에.. 일단 내 몸부터 추스르는 게 더 먼저다 라는 생각으로 회사를 나섰다. 다시 백수가 되었다..   


세 번째 회사는 교육 컨설팅 회사였다. 두 번째 회사에서 퇴사한 후 결혼도 하고 그 이후 경단녀(경력단절 여성)였던 내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준 회사였다. 위치는 집과 편도 기준 30분 남짓 걸리는 거리로 출퇴근이 가까운 이점이 있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일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경력직으로 들어갔고, 내가 만드는 디자인을 선호하는 분위기였다. 디지털 디자인(웹, 모바일)과 인쇄 디자인(카탈로그, 브로셔) 동시 진행이 가능했던 터라 교육 컨설팅 업무에 아주 적합한 능력자(?)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떨어졌던 자존감은 다시 회복되었고, 팀원들 간 협력도 잘 되어 만족하며 직장생활을 보냈다. 그러던 중 전세로 얻었었던 집 계약이 끝나고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출퇴근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30분으로 늘어났다.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면 3시간을 그냥 대중교통으로 보내는 것이다. 첨에는 괜찮겠지 했으나 회사에 다니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체력도 떨어지고, 대중교통에서 부대끼는 진상 고객들로 스트레스받는 날이 잦아졌다. 이사하고 나서 본격 새로운 가족 만들기(임신) 준비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요인들이 겹쳐 회사를 다니기 싫어지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이사 후 1년 더 다니다가 결국은 가족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거리가 멀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인사담당자는 자신도 그 상황(난임)이었어서 이해한다며 오히려 나를 토닥여주었다. 2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 이야기한 직후 병원을 다녀오면서 임신 사실도 알게 되었다!(신랑은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소식에 물론 기뻐했지만 퇴사 이야기 전에 확인했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고 아쉬움도 함께 전했다.) 


출산하고 현재까지도 나는 백수이지만 다시 직장생활을 준비하고 있는 사회 준비생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싫은 순간이 가끔 오듯이 어떤 사유로든 그만둘 수 있는 계기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도 신기했던 경험이었다. 이젠 먹여 살릴 식구도 늘어난 상황이니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오래 근무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볼 수 있는 능력으로 좋은 회사를 찾아볼 예정이다. 다시 신나게 힘나는 직장인이 될 수 있는 그날까지 힘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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