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시 작
아, 꽃다운 시절 ‘훅’하고 오글거리며 웃음이 났다. 이번 잡지의 테마가 결혼이야기라며 사진을 보내라는 문자가 왔다. 아마도 사진을 첨부하려는 모양이다. 적당한 사진을 고르려고 앨범을 뒤적였다. 차곡차곡 쌓여진 세월의 더께로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던 추억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시작 된 것이었다.’ 는 혼잣말과 함께 흐뭇함이 먼지처럼 풀풀 일어났다. 신혼여행이다. 한장 한장 넘겨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신랑신부뿐이다. 이십대 후반의 주인공 한 쌍이 그 속에 있었다. 그들의 세상이 시작 된 것이다.
한껏 치장한 신랑신부가 낯선 게 당시의 상황과 설정이 읽혀진다. 수줍은 듯도 하고 어수룩해 보이기도 한다. 야릇하면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마주보고 웃으며 사랑한다고 끝없이 속삭이는 듯 보이고, 바닷가 나무 탁자에서는 변치 말자고 손가락을 거는 모양새다. 폭포를 배경으로 힘든 일이 생겨도 잘 이겨내자는 다부진 표정이다. 연자방아를 가운데 두고 신랑은 끌고 신부는 뒤에서 미는데, 연자방아가 그들이 살아내야 할 삶처럼 여겨진다. 돌하르방을 끌어안고, 갈대밭에서 돌탑을 쌓으며 길고 긴 미래, 불투명한 앞날에 신뢰의 씨앗이 싹트고 든든하게 뿌리내렸으면 하는 간절함이 보인다.
신혼여행은 신혼부부의 생존력과 친화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위험하고 낯선 곳으로 보내던 유목민족의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시작의 충격을 줄이기 위한 여행이라고도 했다.
나에게도 신혼여행은 우리라는 공생관계의 첫 걸음을 떼는 길이었다. 부모 품을 떠나 부모가 되기 위한 절차였다. ‘나’가 아닌 우리라는 둥지를 튼튼하게 짓기 위한 의례였다. 그래서 유래에 걸맞게 시작의 충격을 줄이면서 익숙하지 못한 배우자에게 잘 어울리려고 택시기사의 주문대로 간질간질한 장면도 많이 연출했던 것 같다. 어른입네 어깨를 부풀리고 서 있는 우리가 우스워 죽겠다.
출발점에서 꽤 멀리 떨어진 생의 한가운데다. 얼마 전 신혼여행 이후 처음으로 둘만의 여행을 했다. 슬로베니아 블레드 성을 둘러 볼 때였다. 멀리서 보니 130미터 높이에 우뚝 서 있어 웅장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기대와 달리 작고 소박한 고성이었다. 담쟁이덩굴과 이끼, 부서진 돌계단 등에서 연륜이 느껴지는 게 푸근하니 나하고 잘 맞는 듯 편안했다. 결혼이라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 행복하리라는 기대로 황홀하게 시작했는데, 현실은 행복하지도 황홀하지도 않다는 걸 깨달아 가는 과정 아니던가. 생활에 치이고 부대끼며 잔뜩 부풀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조금씩 빠져 나가는 것을 서글프게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다듬어져 점점 편안해 지는 것 같다.
블레드 시가지와 호수가 시원하고 아름답게 내려다 보였다. 그 곳을 배경으로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뭐가 못마땅한지 뿌루퉁해 가지고, 가져 간 셀카봉도 꺼내지 않고 사진도 찍기 싫다고 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모르던 새로운 면모다. 아직도 더 다듬어 적응해야 할 게 있었나 보다. 내가 독사진 찍으려고 유럽까지 왔나 싶은 게 서러워졌다. 내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고, 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 후로도 우리는 원정 경기하러 온 씨름 선수 같았다. 여행 내내 사사건건 티격태격 먹는 것부터 기념품 사는 것까지, 사소한 의견 차이로 상대방을 무시한 채 자신에게 맞추지 않는다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입으로만 했구나 하면서, 출발해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도 어른이 되기는 여전히 요원한 모양이다. 그래도 여행 중 아플까, 입에 맞지 않는 음식에 체하지는 않을까, 시차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할까 서로가 걱정을 많이 했다. 그게 우리를 묶어 주는 끈끈함이었다. 그 끈끈함으로 시작부터 지금까지 걸어 왔고, 여행에서도 손잡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철도 들기 전에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함께한 시간의 무게로 낯설지 않은 게 다행 아닌가. 갈수록 닮은꼴이다.
칠천겁의 인연이 쌓여서 이루어진 대단한 관계인데, 시작했을 때의 비장함을 간직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내 영혼은 계속 다듬어져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