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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파 Apr 02. 2022

잘 가요! 노래하는 장발의 드러머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테일러 호킨스를 추모하며


만약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록밴드'를 묻는다면, 나는 고민 없이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이름을 뽑을 것이다. 2015년 7월, 다리에 깁스를 한 채 기타를 치는 리더 데이브 그롤(Dave Grohl)을 직접 목도했던 순간 이 마음을 굳혔다.


푸 파이터스는 너바나(Nirvana)의 드러머였던 데이브 그롤이 결성한 록 밴드다. 20년이 넘는 활동을 이어오면서, 12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거머쥔 공룡 밴드다.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긴 했지만, 푸 파이터스의 음악은 언제나 하드 록에 근간을 두고 있다. 대중음악의 트렌드가 바뀌어도 아날로그의 작법을 고수해왔다. 그래서 나는 푸 파이터스를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영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푸 파이터스의 록 음악은 직관적이고, 거칠지만 따뜻하다. 'Walk', 'Everlong', 'Learn To Fly', 'Time Like These' 등 긍정적인 기운을 내뿜는 곡들을 좋아한다. 특히 'Walk(2011)'는 내가 20대에 가장 많이 들었던 록 넘버 중 하나일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4PkcfQtibmU&t=20s

Foo Fighters - Walk(2011)




너바나의 후광을 차치하고도, 이 밴드의 정신적 지주는 단연 데이브 그롤이다. 그러나 드러머인 테일러 호킨스(Taylor Hawkins)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얼굴 마담이다. 앨라니스 모리셋의 드러머로 활동했던 테일러 호킨스는 2집 < The Colour And The Shape >(1997)을 기점으로 푸 파이터스에 합류했다. 이후 25년 동안 밴드의 멤버로 활약했다. 데이브 그롤의 팬을 자처했던 그는 성공한 덕후이기도 했던 셈이다.


금색의 장발을 휘날리며, 호쾌하게 드럼을 내려치는 그의 모습은 한번 보고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동시에 테일러 호킨스는 노래하는 드러머로도 기억된다. 'The Pretenders'처럼 난이도가 높은 곡에서, 탄탄한 코러스를 넣어주는 것은 물론이다. 퀸(Queen)의 광팬인 그는 종종 프레디 머큐리처럼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한다. 어떤 밴드의 보컬로도 손색이 없을만큼 근사한 노래 솜씨를 들려준다는 점에서는 퀸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를 똑 닮았다.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기타), 존 폴 존스(베이스), 그리고 데이브 그롤의 연주에 맞춰 'Rock And Roll'을 불렀던 2008년 웸블리 공연 역시 명장면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무대에 오른 테일러 호킨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푸 파이터스를 두고 '데이브 그롤의 원맨 밴드' 따위의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재능은 넘쳐 흘렀다. 2000년대 중반에는 테일러 호킨스 & 더 코트테일 라이더스(Taylor Hawkins & the Coattail Riders)를 결성해, 또 다른 음악 세계를 펼쳐 나가기도 했다.



지금도 내 방에는 푸 파이터스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왼쪽 끝에 서 있는 남자가 테일러 호킨스.


하염 없이 포스터를 바라본 이유


지난 3월 25일(현지 시각), 테일러 호킨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콜롬비아 보고타 공연을 앞둔 당일 전해진 소식이었다. 향년 50세.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팬데믹 이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투어가 지난 여름부터 재개되었고, 푸 파이터스는 한창 남미 투어를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4월 초에는 그래미 시상식 공연 역시 예정되어 있었으니 안타까움은 더 컸다.


푸 파이터스의 호쾌함과 대비되는 비극은, 뮤지션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테일러 호킨스의 롤모델이었던 로저 테일러는 좋아하는 동생을 잃은 것만 같다며 애도를 표했다. 테일러 호킨스가 존경했던 뮤지션부터, 그를 동경했던 후배 뮤지션들까지, 일제히 상실감을 토로했다.


동료 뮤지션들의 그것만큼은 아닐지라도, 나 역시 그에게서 동시대성을 느꼈다.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챙겨 들었고, 운동을 할 때도 테일러 호킨스의 드럼이 페이스를 높여 주었다. 한 공간에서 관객과 아티스트로서 호흡했던 내한 공연의 기억 역시 여전히 생생하다. 이를 악물고 드럼을 치는 모습에 열광했다.


허무한 마음은 밴드에 대한 애정에 비례했다. 테일러 호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내 방에 붙어 있던 푸 파이터스의 포스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앨범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생했고,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빛났던 노래 'Sunday Rain(2017)'도 반복 재생했다. 테일러 호킨스의 마지막 공연이 된 푸 파이터스의 칠레 공연 영상 역시 찾아보았다. 애도로 여념이 없는 하루가 흘러갔다.


1972년 2월 17일 ~ 2022년 3월 25일. 


정력적인 드러머에게 꽉 닫힌 생몰 년도가 주어졌다. 비개인 날의 화창한 오후 역시 야속하게 느껴졌다. 커트 코베인에 이어 다시 한번 동료를 잃게 된 데이브 그롤의 마음도 헤아려 보았다.


하지만 슬픔에 머물지 않고, 그가 만든 위대한 순간들을 기억해보기로 한다. 이렇다 할 변수가 없는 이상 죽을 때까지 푸 파이터스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드럼을 치던 남자의 모습 역시 기억할 생각이다. 안녕히 가시길. 나의 록스타, 노래하는 장발의 드러머 아저씨.



"There goes my hero. Watch him as he goes."

그렇게 나의 영웅은 가버렸어.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지.


- 'My Hero(Foo Fighters)' 중


아름다웠던 내한 공연의 추억(2017.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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