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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Dec 02. 2018

꿈꾸기 또는 눈 멀기

<퍼스트맨>과 닐 암스트롱이 꿨던 꿈에 대하여

꼭 어둠만이 주변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다. 찬란함 또한 어둠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찬란함에 눈이 머는 것이다. 밝은 대낮에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한동안 앞을 볼 수 없듯이. 꿈을 꾼다는 것은 대낮에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꿈을 보는 일이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보다 더 지독한 이유는, 태양은 계속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시려 계속 보기 어렵지만, 꿈은 계속 그것만을 바라보게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꿈을 좇으라 말하는 세상이지만, 찬란한 꿈의 대가에 대해서 말하는 이는 많지 않다. 꿈을 위해 "무엇"을 투자하고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꿈을 바라보는 순간 "무엇"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된다.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딛었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을 그린 데미언 샤젤 감독의 새 영화 <퍼스트맨>은 그러한 "찬란함에 눈 멀기"에 대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는 닐 암스트롱과 그의 우주비행사 동료들이 달에 가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다룬다. 인류를 달에 보내겠다는 1960년대 미국의 아폴로 프로젝트는 미국을 넘어선 인류의 자랑과 긍지이다. 그러나 그 자랑과 긍지 이면에는 광기와 집착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말하기 불편해하는 진실이다. 데미언 샤젤 감독은 용감하게도 그 감춰진 뒷면을 건드린다. (그가 정확하게 감춰진 곳을 찔렀다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달에 성조기가 꽂힌 장면이 영화에서 없다며 공개적으로 영화를 비난했다는 희극적인 사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냉전 시대의 집단적 광기는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찬란한" 아이디어를 낳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각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그 목표에 자발적으로 헌신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희생을 발판으로 닐 암스트롱과 그의 동료들은 달에 발을 딛는다. <퍼스트맨>은 인류가 달에 성조기를 꽂는 영광의 순간보다 그러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했던 어떤 것들에 주목한다.


달빛에 눈 멀기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 (라이언 고슬링)

<퍼스트맨>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누군가의 죽음과 장례식이다. 영화의 초반부 닐 암스트롱은 딸의 죽음을 겪고, T-38 착륙 실패 사고로 동료를 잃는다. 몇 년 후 아폴로 1호는 화재로 발사 직전 폭발하며 탑승한 우주비행사 3명이 사망한다. 죽은 우주비행사의 곁엔 미망인들이 남고, 산 우주비행사의 곁엔 곧 미망인이 될지 모를 부인들이 남는다.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기 전까지 닐 암스트롱의 어깨엔 항상 죽음이 얹혀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는 영화 속 어떤 대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우주비행사와 그들의 가족 주변을 맴도는 죽음의 이미지는 건조한 회색의 톤으로 맞추어진 영화의 미장센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어쩌면 영화에서 드라마틱한 서사를 제거하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느린 호흡으로 서사를 전개한 데미언 샤젤 감독의 선택 또한, 인물들 주변을 맴도는 죽음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느려진다. 사고 등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찰나에 남짓한 최후의 순간에 그들의 삶 전체를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죽음은 시간마저도 압도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지루한 장면과 장면들은 당시 우주비행사들은 양쪽 어깨에 죽음을 올려놓고 긴 시간들을 그들의 목표를 위해서 버티고 버텼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닐 암스트롱과 우주비행사들은 그들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달에 가려고 하는 것일까. 영화 <퍼스트맨>에 대한 주요한 비판 중 하나는 영화 내에서 왜 닐이 달에 가려고 애쓰는지에 대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길 ‘왜’ 가야 했는지 좀더 물었더라면"이라는 씨네21 송형국 평론가의 한줄평이 그러한 비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왜 달에 가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주비행사들과 휴스턴 NASA 엔지니어들의 동기에 대해서는 두리뭉실하게 표현될 뿐이지만, 달 탐사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파들의 목소리는 구체적이며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예를 들면, 영화는 우주비행사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인한 반대 측 시위대의 목소리에 인상적인 장면들을 할애하며, 달 탐사 프로젝트의 비용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작가 커트 보거네트의 목소리는 그의 실제 인터뷰 장면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적 장치들을 생각한다면, <퍼스트맨>은 우주비행사들이 거길 왜 가야 했는지 충분히 묻지 못한 것이 아니라, 거길 왜 가야 했는지 물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가 달 탐사 이유에 대해 침묵한 것은 아마도 달에 가야만 하는 것에 아마도 합리적이고 이해 가능한 이유 따위는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주비행사들은 단지 달에 간다는 꿈 자체에 눈이 멀었을 뿐이고, 다른 모든 것을 살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슬픔까지도.


데미언 샤젤 꿈 삼부작

<위플래시>의 플래처 교수와 주인공 앤드류

그는 뉴욕 재즈 신을 그린 <위플래시>의 건조한 터치에서 시작하여, 밝고 또 밝은 도시 LA를 배경으로 한 <라라랜드>의 낭만으로 잠시 발을 옮겼다가, 다시 60년대 휴스턴으로 향하여 <퍼스트맨>에서 죽음과 우울을 다룬다. 뉴욕, LA, 휴스턴을 관통하는 데미언 샤젤의 영화들에 이름을 붙인다면 "꿈 삼부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데미언 샤젤이 꿈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영화를 더 만들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세 영화는 서로 분위기가 무척이나 다르기는 하지만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심지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마저도 희생하는 꿈에 대한 추구. 


<위플래시>에서 플래처 교수는 최고의 재즈 연주를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극한으로 내몬다. 그의 전 제자 케이시는 최고의 트럼펫 연주에 닿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행복, 삶, 목숨을 잃는다. 영화의 주인공인 앤드류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서 광기에 가까운, 그러나 무척이나 격정적이며 아름다운 연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앤드류 또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케이시의 뒤를 따를 것임을 암시하며 끝난다.


데미언 샤젤 감독은 얼핏 낭만적으로 보이는 <라라랜드>에서도 꿈을 위한 대가를 그린다. 여주인공 미아는 헐리우드에서 성공한 배우가 꿈이다. 남주인공 세바스찬은 자신만의 재즈 바를 열고 그곳에서 연주하는 것이 꿈이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에게 무척 소중했던 존재였으며,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꿈을 이루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두 명의 연인들은 자신들이 꿈을 위해 사랑마저도 버린다.


<퍼스트맨>에서도 마찬가지로 우주비행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들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꿈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데미언 샤젤 감독이 꿈 삼부작의 세 번째 작품을 달을 주제로 삼은 것 또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달은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가 같기 때문에 (이를 조석 고정이라고 부른다.) 지구에서 달을 볼 때는 한쪽 면 밖에 볼 수 없다. 우리가 꿈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꿈에 눈이 멀어 꿈의 뒷면을 볼 수 없다.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듯이.


꿈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연 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꿈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눈이 멀어 가장 소중한 것 마저도 희생하는가. 꿈에 대해서는 주류 이론과 그에 맞서는 비주류 이론이 존재한다. 꿈에 대한 주류 이론은 그 위세가 최근 들어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론적으로 그것은 옳지"라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꿈을 찾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고, 꿈을 위해서는 누구나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주변의 몇몇 것들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주류 이론은 여러 가지로 변주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꿈의 주류 이론을 다룬 최초의 저작이었으며,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꿈-노력-성공의 삼단 논법은 수많은 사람들을 북아메리카로 이끌었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서 "노오력"이라며 조롱당하는 처지가 된 기성세대의 노력 담론 또한 꿈의 주류 이론에 대한 변주에 해당한다. 


반면 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비주류 이론도 존재한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이쪽 이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의 실천자들은 노력해도 이룰 수 있을지 모르는 꿈을 좇느니 작지만 이룰 수 있는 현재의 소소한 행복, 즉, 소확행을 추구한다. 눈 앞의 소확행을 놔두고 먼 미래의 불확실한 성취감을 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미래에 꿈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경제적 상황 아래에서는 그들의 소박한 선택이 오히려 영리한 전략일 수 있다. 꿈에 대한 이 이론은 비록 비주류일지언정 그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가고 있다. 어느 지점에서는 이 이론이 오히려 주류이고, 꿈을 추구해야 한다는 기존 이론이 비주류가 되는 지점도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언 샤젤의 "꿈 삼부작"이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던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과 소확행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꿈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위플래쉬>의 앤드류, <라라랜드>의 미와와 세바스찬,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의 모습은 꿈과 소확행 사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누구가 보더라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꿈 삼부작"은 그들처럼 자신의 꿈에 눈이 먼 이들에게는 동병상련과 감정 이입을, 소확행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동경과 낭만을, 그리고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폴로 11호 사령선 컬럼비아 호에 홀로 남은 마이클 콜린스가 찍은 인류의 전부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과 함께 아폴로 11호에 탑승했지만, 달에 착륙했던 암스트롱과 올드린과 달리 사령선 콜럼비아에 남아야 했기 때문에 달을 밟지 못했던 마이클 콜린스가 찍은 사진이다. 달 착륙 임무를 마치고 사령선을 향해 다가오는 달 착륙선 이글 호와 그 너머로 보이는 지구. 이 사진을 잘 살펴본다면 우리는 마이클 콜린스가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을 제외한 인류 전부를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을 제외한 모든 인류는 지구에 있고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착륙선 이글 호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클 콜린스의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절대적인 고독, 말 그대로 등 뒤에 아무도 없다는 절대적인 고독이다. 어쩌면 이 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고독은 꿈에 눈이 먼 자들이 반드시 느껴야만 하는 고독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 전부를 등 뒤에 놓고 와야만 할 정도로 꿈에 눈이 머는 일은 무섭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낳는 절대적인 고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과 고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는 누군가는) 꿈에 이끌려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눈 앞에 놓인 것을 보지 못 하고 저 멀리 흐릿할 뿐인 무언가를 갈망한다. 그것을 쥐기 위해 눈 앞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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