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발터 벤야민에 대하여
하늘이 어제부터 무겁게 가라앉아 있더니, 오늘 아침엔 공기에서 비 냄새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예보에서는 낮부터는 비가 내린다고 말했다. 단우산을 넣은 가방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무거운 구름이 낮게 떠 있는 하늘을 보는 출근길 아침, 나는 좋아하는 시인의 산문집을 읽었다. 비의 냄새를 머금은 날의 아침이 마치 터지려는 울음을 참는 이의 표정 같았고, 그 시인의 산문에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한구석에 슬픔 상자를 가지고 있다. 눈물 냄새가 나는 축축한 기억들이 그 상자에 봉인되어,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그 슬픔이 터져 나오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축축한 아침에 그 상자를 잠근 자물쇠는 쉽게 녹이 슬어 풀려 버린다.
어쩌면, 그 상자의 자물쇠가 열리는 그 순간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발견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 이도록 하는 무언가를 슬픈 기억 가운데에 나도 모르게 끼워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낮의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그것은 불을 때기 위한 장작을 모으는 일일 뿐, 장작에 불을 붙여 철학이 비로소 시작되는 순간은 밤이라고 한 적이 있다 [1]. 그것은 밤의 적막이 우리가 홀로 있도록, 우리가 내면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어두운 밤이나 비 오는 날의 어두움은 우리가 마음속 슬픔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파르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마음속 상자를 여는 여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비 오는 날 아침, 한 포르투갈인 여자를 만나며 지금까지 자신이 살던 삶에 등을 돌리고 리스본으로 가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는다. 파르칼 메르시어가 왜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된 날을 비 오는 날 아침으로 정했을까. 그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레고리우스의 마음은 아침부터 세차게 내렸던 비로 인해 어딘가 무장 해제된 상태였을 것이고, 포르투갈 여자와의 우연한 만남은 그가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게 하는 임계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 여자와의 만남은 그에게 총알이 발사되기 위한 한 발의 방아쇠나, 99도에서 물이 끓도록 하는 남은 1도의 열과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고, 비 오는 날의 침잠은 총에 장전을 하거나 물을 99도까지 데우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그레고리우스의 리스본행 여행은 자신의 삶을 찾는 여정에 대한 소설적 은유다. 그는 리스본에서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과 죽음을 쫓는다. 하지만 그가 쫓았던 것은 이미 죽고 없는 아마데우의 삶이 아니라, 그로부터 찾을 수 있는 그 자신의 진정한 인생이었다. 그는 생존해 있는 아마데우의 지인들과 가족들을 만남으로써 아마데우가 겪었던 성장 과정과 철학의 변화와 포르투갈 독재 정권의 시절을 온전히 살펴보게 된다. 그가 리스본으로 가기 전까지 유명인도 아니었던 포르투갈인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했던 것은 아마데우의 온 생애, 즉, 자신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고 죽었던 사람의 생애를 앎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가 봤던 것은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이 아니라, 자신이 가졌던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파르칼 메르시어는 자신의 소설에서 몇 번이나 말한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지만, 늘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것은 아니다. 현재 처한 상황, 가진 돈,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들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삶의 대부분의 순간들에서 내가 하기를 요구받는 일들을 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될 수 없다. 야간열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떠나는 식으로 삶의 형태를 극적으로 바꾸지 않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우리의 인생을 상상할 수 있다.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를 상상력이라고 주장한다.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가진 강한 능력이라면, 그것을 생존이나 커리어 유지 같은 일에만 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찾는 일에도 써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아를 찾기 위해 상상이라는 힘을 이용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아마도, 비 오는 날 마음속 슬픔 상자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때로 그 상자를 여는 일은 나를 상처 입히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찾을 때 분명 그 안에서 우리는 나를 나이게 하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잊었던 것을 결코 온전히 되찾지는 못한다. 그 점이 어쩌면 좋을 수도 있다. 과거를 다시 찾게 된다면 그 충격이 너무 파괴적이어서 우리는 그 순간 왜 우리가 그토록 그것을 동경했는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동경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안에 깊숙이 가라앉아 망각된 것일수록 더욱더 잘 그것을 이해한다. (...) 지난 삶 전체의 무게로 무거운 망각된 삶은 이제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중 <글자상자>, p.90.
유대계 독일인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글 중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가장 매력적인 글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일 것이다 [2]. 벤야민의 저작 목록을 보고 있으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같은 여러 진지한 철학적 제목들 사이에 이 두 책이 눈에 띈다. 과연 진지한 철학자로 하여금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 내밀하고 개인적인 글을 쓰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의 온 삶과 모든 철학이 그의 베를린 시절로부터 빌려온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이 예전에 잃어버렸던 것일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 또한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를 탐색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찾는다. 아마 벤야민 또한 평생에 걸쳐 그의 과거를 기억하고, 묻혀있던 과거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 상처받으며, 그 상처로부터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얻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과거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요? 난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사실 그의 만용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것으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나 자신감의 말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예전에 잃어버렸던 것, 슬픔 상자 속에 담긴 것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는 "온전히 되찾지는 못 할 것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그러나 그것을 되찾을 때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새롭게 조명하는 도구가 된다.
'기억'이라는 말은 기억이 과거를 탐색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거가 펼쳐지는 무대라는 것을 오해의 여지없이 밝혀준다. 죽은 도시들이 묻혀 있는 매개체가 땅인 것처럼, 기억은 체험된 것의 매개체이다. 묻혀 있는 자신의 고유한 과거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은 땅을 파헤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억의 어조와 태도를 규정한다. 진정한 기억에서는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흙을 뿌리듯이 기억의 내용을 뿌리고, 땅을 파듯이 그 내용을 파헤치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억의 내용은 내부에 진짜 귀중품들이 묻혀 있는 성층이나 지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짜 귀중품들은 아주 꼼꼼한 탐사를 통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기억은 서사적이고 광상곡과도 같은 리듬으로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서 삽질을 시도해야 한다. 또한 같은 장소에서 점점 더 깊은 층으로 파헤쳐 가야 한다.
- 발터 벤야민, <베를린 연대기>, pp.191-192.
벤야민은 기억을 더듬는 일을 고고학자의 일에 비교한다. 기억은 과거 안에 박제되어 고정된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에게 말을 거는 무언가에 가깝다. 어쩌면 과거는 미지의 지혜로 우리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신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그 아래에 쓰인 글만 주의 깊게 읽으면 되지만,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알기 어려운 은유와 시적 언어를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렵게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는 매우 적었다고 한다.)
기억은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내 것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금 여기' 존재해야 하며, 그것에 대한 통제권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라는 '이곳 너머'에 존재하며, 기억은 현재의 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심지어 내가 기억하는 것이 온전한 진실이 아닐 때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기억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매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을 새로 보는 것처럼, 또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처럼 기억에 접근해야 한다.
나에게 가장 낯선 것은 어쩌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로부터 알려져 있지 않은 나의 영역을 밝히는 것이 우리 삶의 소명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니체 식의 주인의 도덕, 노예의 노덕을 운운하며 자아에만 집중하자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자아 찾기'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낼 변화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니체의 철학보다 레비나스의 철학에 끌린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이러한 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그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 심지어는 그와 무관했던 포르투갈인들의 삶까지도 극적으로 변하도록 한다. 이때 말하는 "삶의 변화"는 앞으로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이 겪었던 '기억 속의 삶'까지도 포함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다음 목적지는 섬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1] 정확히 어떤 철학자의 어떤 책에서 읽은 말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벤야민이나 레비나스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2] 한국에서는 길 출판사에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으로 한 권에 묶여서 번역 출판되었다.
오랜만입니다. 한동안 주 1회 연재를 하다, 어느 순간 소재도 떨어지고 쓰고 있던 글도 막히는 순간이 잦아져 새로운 포스팅이 뜸했습니다. 사실 처음 글을 기획할 당시만 해도 한 20편 정도면 단행본 1권 정도 분량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설정했던 목표에 다다르고 연재가 끝날 때가 다가오니 이상하게 새 글을 쓰기가 더 어려웠던 것 같네요. 아마 이제 남은 글은 한두 편 정도이지 싶습니다. 지금 제가 미국으로 일터를 옮기게 되는 상황이라 매주 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