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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Dec 29. 2018

봄이 지나간 그 자리

<봄날은 간다>와 <Hello>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비가 온 뒤 땅에 떨어져 시들시들한 벚꽃을 보는 것만큼 처연한 일이 또 있을까. 아직 여름은 아니어서 부는 바람에는 한기가 어느 정도 여려 있는 사이, 땅에 떨어진 젖은 벚꽃은 초라할 뿐이다. 벚꽃이 지는 것은 봄날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쓸쓸한 표지다. 열정이 지고 낭만도 지고 그것을 지탱해주던 정 마저도 지고 있다는 표지. 계절이 바뀌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봄이 지는 것은 유독 마음이 시리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는 봄날이 지나가는 그 지점을 포착한다.


작은 소리를 듣는 일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 [1]

서울에 사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강릉 KBS 라디오 PD  은수(이영애)를 만난다. 처음은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일 때문이었다. 춥던 겨울이었다. 그 겨울, 그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듣고 그 미묘한 소리들을 녹음하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든 소리를 민감하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이들은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상처와 사정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관계의 파열을 예고하는 그 작은 소리들. 그들은 겨울에 만나 여름이 되었을 때 서로에게 익숙해져 심드렁해진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만큼 그 소리는 작았을 것이다. 얼음이 녹는 소리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을 수 없는 미묘한 소리처럼. 그 소리들을 듣지 못한 결과, 수줍게 끓여주던 라면은 어느샌가 생활 속에서 무심하게 먹는 라면이 되었고, 떨리던 마음으로 들어가던 은수의 집은 어느새 익숙하게 들어가는 내 집과 다름없는 곳이 된다.


삶은 늘 그렇다. 실패한 연애를 포함한 모든 실패담들을 뒤돌아 보면 작은 소리들을 듣지 못한 결과가 모여 내가 겪은 그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호수의 얼음이 녹아 갈라져 얼음 조각들이 저 깊은 물아래로 가라앉는 그 소리는 당시에는 결코 들을 수 없던 소리다. 그러나 모든 얼음이 녹아버린 다음에는 분명 내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내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아쉬움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소리를 얼음이 녹는 당시에 들을 수 있었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얼음이 녹는 것은 계절이 바뀜에 따라 일어나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까? 지나간 일에 '만약'을 붙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실패는 그저 실패일 뿐이고, 과거에 벌어진 실패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실패는 우리에게 크고 작은 구멍들을 남긴다. 영화에서 상우가 지질하게 은수의 뒤를 캐는 장면이나, 은수가 몇 번이나 상우를 찾는 장면들은 그들이 갖게 된 구멍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그런 행동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 구멍은 결코 얕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한참 동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상우와 은수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평생 그들은 그 구멍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상우의 할머니가 바로 그런 경우다.)

 

잃어버린 것을 통해 나아가기

Adele, <Hello>

지난 봄날은 우리의 마음속에 큰 구멍 하나를 남긴다. 아름다운 추억조차 아픔이 되는 구멍.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구멍 여러 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멍은 수많은 이별 노래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델의 <Hello> 또한 그러한 노래다. 아델은 전화기 맞은편에서 ("hello from the other side") 그리고 바깥에서 ("hello from the outside") 헤어진 그를 향해 수십수백 번 hello를 외친다.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저 미안하다고,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을 뿐인데도 ("to tell you I'm sorry for breaking your heart") 그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에게 전화를 건다. 이 지점에서 아델의 <Hello>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가 상우를 여러 번 찾는 장면과 겹쳐진다. 아델도, 은수도, 그리고 우리도 아마 마음에 난 구멍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뚫린 그 구멍 앞에서 두 가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 구멍에 끊임없이 빠져들거나, 아니면 그 구멍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 어쩌면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2]. 그 봄이 지면서 남긴 구멍은 그저 구멍이 아니다. 구멍 자체로는 그저 빈 공간, 마음의 풍경을 해치는 결점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 구멍을 통해 나아갈 수 있다.


구멍을 통해 나아간다는 것은 구멍을 뛰어넘은 뒤 구멍이 없던 것처럼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걷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 구멍을 직시하고 구멍 안으로 뛰어드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치열하게 그 구멍을 마주 보고 고통받은 다음 우리는 그 구멍이 이어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구멍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가진다 [4]. 영화의 마지막 순간, 상우가 보리밭에서 바람에 보리가 흔들리는 소리를 채집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 장면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내가 본 그 장면은 찾아올 다음 봄에 그는 더 소리를 잘 듣는 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봄의 언덕 위에 서서

그렇기 때문에 지나버린 봄은 무의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봄날이 간다>의 실패한 연애담을 단지 은수의 어장관리나 상우의 지질함으로만 읽는다면, 가버린 그 봄은 우리에게 시간 낭비 이상이 될 수 없다. 옛 연인의 차를 열쇠로 긁거나(상우), 옛 연인의 짐을 모아 현관문 앞에 내놓은 채 자는 척하는 식(은수)으로 지나가고 있는 봄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봤자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하나의 봄이 지고 떠나가버릴지라도 새 봄은 늘 다시 찾아올 것이다. 비록 실패한 각각의 봄이 작은 소리를 듣지 못 한 수많은 실수로 이루어져 있을지언정, 여럿의 실패담을 수북이 쌓는 일은 어쩌면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른다. 실패한 봄의 언덕 위에 선다면 그전에 보지 못 했던 것들을 볼 수 있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 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면 어쩌랴, 실패한 봄의 언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1] 이미지 출처: <영화 '봄날은 간다' 속편이 제작된다면, 이 장면에서 20년 후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허핑턴 포스트.

[2]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p.484.

[3]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인터뷰, 씨네 21.

[4]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러한 '구멍 지나가기'를 매혹적이지만 위험해 보이는 환상을 통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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