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 셀민스와 박준과 느리게 걸어오는 기억에 대하여
기억 속에 고정되기까지 한참이나 걸리는 과거가 있다. 그런 과거는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참을 헤매고, 헤맨 시간만큼 스스로를 끊임없이 되부르며 다시 쓴다. 그런 기억은 자신의 자리를 늦게 찾은 만큼이나 그 자리에 깊게, 그리고 오래 머문다. 어쩌면 '나'를 이루는 것은 그런 지연된 기억들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주고받은 상처들에 대한 기억이나, 내가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에 대한 기억, 여러 해 동안 나를 괴롭혔던 내 처지에 대한 기억과 같은 것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도 그런 기억들은 느리게 그리고 오래 걷는다.
우리가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에도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우리가 본 작품이 우리에게 인상 깊었다면 그 작품에 대한 인상은 우리 기억 어딘가에 자리 잡는다. 때로 작품 감상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자리를 찾기까지 한참이 걸리기도 한다. 인상 깊은 작품에 대한 기억은 나 자신의 내밀한 다른 기억들에 레고 블록처럼 올라 붙기도 하고, 다른 기억들과 하나로 엉키는 식의 화학 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미술관에서 작품을 본다는 이벤트는 결국 우리 삶에 어떤 사건(event)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실험에 다름없다.
2018년 12월 15일부터 2019년 3월 31일까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SFMOMA)에서 열리는 라트비아계 미국인 작가 비야 셀민스 (Vija Celmins)의 회고전 <이미지를 기억에 고정하기(To Fix the Image in Memory)>은 비야 셀민스의 작업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지연된 기억'에 대한 훌륭한 실험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이기도 했다. 이 전시는 그의 초기 작업부터 가장 최근의 작업을 아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와 기억의 상호작용이라는 일관적인 큰 주제 아래에서 각 작품들이 잘 조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1965년 이래로 지속된 그의 경력 내내 그가 품어왔던 철학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작가 노트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는 적었다. "만약 당신이 이미지를 본다면, 작품을 본다면, 그것은 당신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기억은 그것에 다른 무언가를 할 것이다. 때때로 작품은 희미해지고... 때때로 그것은 남고. 때때로 당신은 되돌아가 기억이 정확한지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경험이다... 주고받기(give-and-take)."
(전시 설명 중 일부)
그렇기 때문에 비야 셀민스는 기억의 지연에 대한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작품 <To Fix the image in Memory I-XI (1977-82, MoMA 소장)>은 비야 셀민스가 지연된 기억에 대한 실험을 어떤 식으로 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22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중 11개는 애리조나와 뉴 멕시코에서 주워온 것이고, 나머지 11개는 청동 위에 색칠을 해서 진짜 돌처럼 만든 것이다. 작가는 왜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모방품을 섞어 놓았던 것일까. 이런 모호함은 감상자로 하여금 수많은 질문을 하게 만들고, 그 질문은 꼭 감상의 순간에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몇몇 질문은 작품 앞에서 즉시 떠오를 것이고, 몇몇 질문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긴 시간을 맴돌고 나서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질문은 영영 답해지지 않은 채로 남을지도 모른다 [1].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박준의 시, <숲>의 첫 몇 문장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숲을 가지고 있다. 박준 시인이 아름답게 표현한 것처럼 그 숲은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하다. 숲이 적막한 것은 나무가 무척이나 우거지기 때문이고, 그 숲이 우거진 것은 숲의 나무들이 천천히 차곡차곡 쌓이는 수많은 말을 양분 삼아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떨어진 낙엽과 불어온 먼지와 지렁이가 뒤섞어서 만들어진 숲의 깊은 흙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그 숲의 소란한 말들 또한 숲의 바닥에 무척이나 천천히 가라앉는다. 어떤 말은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어떤 말은 눈물로 가득해서 그 숲은 소란스럽고 그만큼 적막하다.
6년 만에 나온 박준의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느리게 걸어오는 기억에 대한 시들을 담고 있다. 사실 시라는 장르 자체는 지연된 기억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문학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나를 거쳐간 숱한 사건과 말과 감정 사이에서 뜰채로 거른 뒤에 남는 것만을 함축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시는 본질적으로 걸음이 느린 기억 곁에서 걷는 문학이다. 그러나 박준 시인은 그런 시들 사이에서도 유독 느리게 걷는 시인이다.
박준의 느린 걸음은 그가 쓰는 단어, 그가 쓴 시의 구조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집 말미에 실린 평론에서 신형철이 짚었던 것처럼 박준은 "한국어가 섬세하게 운용될 때만 전달되는 감정"을 탁월하게 전달하는 시인이다 [2]. 그의 시를 읽으면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이, 그가 예스러운 단어로 말하며 다소곳하게 경어체로 말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섬세한 만큼이나 담백하기도 한데, 그는 현학적인 한자어나 외래어, 또는 감정이 흘러넘치는 데에서 비롯된 된소리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러한 박준의 표현이 가지는 특징은 결국 그가 느리게 걷는 지연된 기억을 벗 삼아 시를 쓰기 때문이다. 기억이 고정되는 것이 지연된 만큼 시인은 단어를 정갈히 고를 수 있고, 넘치는 감정을 덜어낼 수도 있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
(박준의 시 <낮과 밤> 중)
낮에 떠오른 질문에 대한 답을 깊은 밤에나 얻고, 그해 여름의 말들을 오늘의 숲 속에서나 기억하는 것처럼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들은 항상 느지막한 속도로 한참을 걷는다.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어떤 사람이 얼마나 깊은 사람인지를 알고 싶다면, 그가 품은 숲이 얼마나 우거지고 깊은지,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기억을 속에 품고 있는지 보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느리고 오랜 기억들의 깊이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른다.
[1] 나의 경우 작품 앞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고, 몇몇 질문은 즉시 답을 얻기도 몇몇 질문은 그 뒤로 여러 주가 지나서야 얻기도 했다. "만약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작품을 봤으면 여러 개의 돌 중 가짜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전시를 다 보고 와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 작품은 어떤 식으로 기억에 남았을까? 작품의 돌들은 무작위로 배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작품 주변으로는 비야 셀민스의 별 그림들이 놓여 있는데 이 작품과 별들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이 작품은 부산에서 본 이우환의 몇몇 작품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또한 이곳에 적을 수 없었던 개인적인 질문들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2]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의 신형철 발문,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