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공정,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내 어린 시절의 일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의 일이다. 여느 주말과 마찬가지로 나는 성당 주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누군가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두세 박스 기부해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상자를 열고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나 몰려들어 줄은커녕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역시 나였는지 소란스러운 것이 싫어 그냥 뒤에 물러나 있었다. 과자 한 봉지에 저렇게 목을 메기 싫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들 한 봉지씩 챙길 테고 나는 그저 남는 것 하나 가져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내 생각과는 달리 그 난리통에 누군가는 두 세 봉지씩 챙겼고 결국 내가 받을 과자는 없었다. 나중에 선생님 한 분이 따로 챙겨둔 과자를 한 봉지 내게 건네며 하신 말씀. "너는 왜 너 걸 못 챙기니."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당시의 내겐 나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엉망으로 엉기더라도 나는 내 것을 챙겨야 했었나?
또 하나의 에피소드. 대학에 입학해서 1학년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영어 수업에서 외국인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한국인은 경쟁을 너무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성장을 하며 어찌 되었든 나는 여느 한국인처럼 경쟁을 체화했고, 그 전까진 경쟁이 문제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당연시했던 것을 누군가는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2002년 월드컵의 성공신화는 선수들 사이의 경쟁 덕분이고, 한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공도 자본주의가 요구한 경쟁의 미덕 때문이었다는 것이 약 10년 전 한국인의 "커먼 그라운드"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왜냐면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목을 매던 경쟁이 사실은 하나도 공정하지 않았음을, 출발선이 다소 들쭉날쭉할지언정 출발하고 나면 모두 공평하게 달릴 수밖에 없는 마라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는 스쿠터를 타고, 누군가는 스포츠카를 몰고 가며 그것을 마라톤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공정은 지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였을지도 모른다. 박근혜 탄핵,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그리고 지금의 조국 사태까지, 그 모두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공정이다. 우리의 경쟁은 공정했는가, 또는 적어도 우리 사회는 경쟁을 공정하게 만드려고 노력했는가. 몇 년을 이어온 시민의 분노는 그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너머를 본다. 공정에 대한 요구로는 충분한가. 공정하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다른 것마저 삼킨 것은 아닌가. 예를 들면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조국 사태에 대한 소위 명문대생들의 시위가 그렇다. 서울대와 고려대로 대표되는 명문대생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였기에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내가 10년 전쯤 그들 중 하나였을 때 느꼈던 것은 내가 비록 동기, 선후배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지언정, 나는 그들과 다른 계급이라는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회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당시에도 이미 경제적 자본을 통한 교육 자본의 상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때에는 지금 이렇게 지탄을 받는 학종도 존재하지 않았다. 논술이나 수리 면접과 같은 몇 개의 수시 전형이 있기는 했지만 난이도도 상당하고 선발 인원도 많지 않아 수능을 통한 정시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들어간 대학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계급적 동질성이 있었다. 강남과 비강남, 서울과 비서울, 혹은 부자와 아닌 자. 그런 그들이 과연 구의역 김 군과 태안화력 김용균 씨의 비극 앞에서 단 한 번이라도 그런 큰 규모로 촛불을 들었던 적이 있었는가. 사회적 자본이 집약된 곳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한 뒤, 학벌이라는 특권을 평생토록 누리는 그들이 한 번이라도 자신의 특권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을까 [1]. 물론 나도 잘 안다. 학벌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특혜는 아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의역 김 군이나 태안화력 김용균 씨 앞에서 학벌이 더 이상 특혜가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염치의 문제다.
공정한 경쟁이라면 충분한가. 그것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결국 공정한 경쟁이라는 주장은 "경쟁은 올바른 것"이라는 10년 전의 스탠더드로부터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엉망으로 뒤엉켜 과자 봉지를 쟁취하는 것을 출발선을 그어놓고 누군가 옆에서 출발 신호를 외치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충분한가. 출발선 앞에서 달릴 수 없는 목소리 없는 이들은 어떠한가. 정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커먼 그라운드는 무엇인가.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답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1] 조국 사태에 대한 분노가 결국 엘리트 내부의 갈등이라는, 즉, 다이아 수저와 금수저 사이의 갈등이라는 한 칼럼에 나는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