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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Sep 30. 2018

한국에서 대학원을 간다는 것

말라 죽고 있는 학계의 문제

얼마 전 김영민 교수의 칼럼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요>를 읽었다. 사실 나는 그분을 잘 몰랐지만 우연하게도 칼럼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문장이 정말 좋다고 감탄하고나서 칼럼의 글쓴이를 확인하면 어김없이 "김영민"이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경우가 요즘 들어 많았다. 그러나 이 칼럼의 경우 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반을 고개를 저은 경우에 해당한다. 칼럼의 요지는 이렇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대체로 한국에서 대학원을 가는 것에 대한 위험은 알고 있다. 그러나 위험한 만큼 비극적이고 로맨틱하니 학자들은 그것에 끌린다. 그러니 그 위험을 감수할 만큼 학문에 대한 낭만에 끌리는지 잘 고민해보라. 


내가 고개를 저은 부분은 첫 부분이다. 학생들은 위험에 대해 어렴풋이 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진짜로 그 위험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그 위험을 실제로 겪고 잘 아는 사람들, 그 위험에 대해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대학원 고연차 학생들이거나 졸업한지 몇 년 되지 않은 포스트닥터들이다. 그러나 대학원을 진학하려고 하는 학부생들과 그들은 접점이 거의 없다.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박사 과정이 최소 5년 이상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학부 졸업생들과 그들과의 시간적 거리가 그만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통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오려는 학생들은 젊은 혈기 때문인지 자신만만하다. 보통 학문에 뜻을 가지게 되는 학생들은 대개 학부 차원에서 재능을 돋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들이 보통 생각하기를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들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대학원에 와 있거나 졸업했던 사람들도 학부생 시절에는 다들 한 가닥 했던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특출하려면 정말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내게 드물게 대학원 진학에 대해 의견을 묻는 이가 나타나거든 나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의식하며 개인적 차원의 충고를 씁슬한 마음으로 해주곤 한다.


1. 개인적 차원의 충고

아무튼 그래서 내게 대학원 진학에 대해 뜻을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무조건 반대한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쭉 나열해주기도, 적절한 비유를 들어 어려움을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그 상담을 끝내는 말은 이렇다. "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다."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주더라도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그들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인지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뿐이다.


2. 구조적 차원의 문제

그러나 내가 이렇게 조언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하는 나의 충고가 한국 학계에는 치명상을 입히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대학원 진학을 단념시키면, 어떤 대학원 연구실에서는 잠재적인 인력 하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 같은 이가 10명이면 10명의 대학원생을 잃는 일일 테고, (자연계 기준) 보통 잘 나가는 연구실의 규모가 그정도임을 생각하면 연구실 하나를 문 닫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대학에서 대학원생 수급에 고민을 겪지 않는 곳은 딱 두곳 밖에 없다. 서울대와 카이스트. 대입 결과로 따지면 그 다음 랭크인 고대, 연대 만큼만 하더라도 대학원생 수급에 큰 고민을 겪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한국 대학원의 인력 수급 문제에 대해 전문연구요원 제도의 축소 가능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의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문연구요원 제도의 문이 점점 좁아지는 것은 단지 의식 없는 환자의 호흡기를 떼버린 것 뿐이지, 환자가 의식이 없게 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인 '청년 실업'에 맞닿는다. 학계가 워낙 소수인 곳인데다가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를 꺼려하는 수줍은 집단이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다면 선택지는 몇 가지 없다. 대학 교수나 정부출연 연구소에 들어가기 위해 기약없는 포스트닥터 생활을 하거나, 소수의 대기업으로 가거나. (중소기업을 가면 되지 않냐고? 그러면 왜 10년이나 걸려서 박사학위를 따나요? 그냥 학부만 마치고 가지.) 미국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는 배출되는 박사들의 진로가 정말 다양하다는 것이다. 회사로 가도 정말 다양한 회사로 가고,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도, 전공과 상관없는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삼지선다를 강요한다. 학계, 기업, 백수.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 학계가 말라 죽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비극적이어서 로맨틱한 낭만"에 끌려서 위험을 안고 대학원에 진학한 소수의 용기 있는 젊은 재능들만으로는 학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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