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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Oct 06. 2019

하이볼 하이웨이

랩탑을 덮은 뒤 그리고 침대에 눕기 전

미국에 와서 확실히 향상된 것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다른 건 몰라도 주량은 확실히 늘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다지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학부 시절 하드 트레이닝 덕분에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술자리도, 술도 그다지 즐기지는 않았다. 가끔 수입 맥주나 한두 잔 즐기는 정도였을까. 그런데 미국에 오니 여러 이유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것도 혼술을. 일단 무엇보다 술이 싸고 다양하니 술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에는 돈 많은 아저씨들이나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양주도 저렴했고, 마이크로 브류잉의 본 고장답게 맥주도 종류가 다양했다. 


자기 전 하이볼 한 잔

사실 앞서 늘어놓은 이런저런 이유들은 혼술의 핑계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자기 전에 긴장을 풀어줄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포닥들은 보통 밥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하루 종일 일을 한다. 내 경우에는 낮에는 연구실에 붙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 예컨대 실험이나 미팅 등을 하고, 밤에는 논문 작성이나 이론 계산 같은 일들을 한다. 남들은 그저 앉아서 얌전히 "공부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런 정적인 일들도 나름 감정 소모가 심한 일이다. 안 풀리는 방정식 앞에서는 어질러놓은 방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고 초조하고, 때로는 그런 감정 기복이 침대에 누워서도 이어져 잠을 이루기 어렵게도 한다. 결국 그런 긴장을 풀어줄 수단이 필요한데, 나의 경우는 혼술 아니면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는 한 번 키면 한두 시간을 금방 보내기에 투자 시간 대비 긴장 완화의 최고는 혼술이다. 


미국에 와서 여러 술을 전전하다가 결국 정착한 것이 하이볼인데, 가장 큰 이유는 가장 싸고 가장 맛있고 가장 빨리 취할 수 있는 술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코스트코에서 50불 정도면 1.75 L Maker's Mark 위스키를 살 수 있고, 거기에 탄산수 한 캔, 얼음 한 조각을 섞으면 웬만한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싸다. 그리고 맛은, 말해 무엇하랴. 


하이볼 한 잔 그리고 적당한 lofi hip hop 라디오면 침대로 가는 하이웨이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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