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일상 - 1
2주 전쯤 주말 금문교 근처 포트 메이슨 센터(Fort Mason Center)에서 열린 아트페어에 다녀왔다. 미술을 좋아해서 이런 이벤트가 있으면 종종 시내를 찾는다. 어쨌든 이런저런 미국 작가들 작품도 많이 보고 나름의 기분 전환도 되었다. 게다가 아트페어에서 반가운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5년 전인가 뉴욕 첼시 스트릿의 한 갤러리에서 봤던 작가의 작품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그 당시 뉴욕 어딘가의 예술대학을 갓 졸업한 작가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미국의 반대편 끝에서 그 작가의 작품을 다시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미국에서 쌓고 있는 인연들도 어쩌면 훗날 마찬가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나는 이 지역에 영구히 정착하려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물론 사람 일은 모르지만) 지금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찾아올 필연적인 헤어짐의 순간을 생각하면 나는 늘 마음 한구석이 서글퍼지고 쓸쓸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서글픔이 결코 허무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언젠가 다시 반갑게 마주치고 인사할 날이 올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나 그간의 소식을 나누고 (또는 미국식으로 "catch up"하고) 각자의 삶에 서로가 겹쳐 있던 시간이 있었음을 기억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아트 페어를 둘러본 뒤 근처 공원(Great Meadow Park) 언덕에 오르니 바다와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날이 유독 맑아 내리쬐는 빛이 수면과 거리와 건물들 모서리에 부딪혀 반짝였다. 연구를 하다 보면 이런 아름다움을 즐길 새가 잘 없다. 버클리 어딘가의 오피스에 앉아 있으면 창 밖을 볼 일이 잘 없고, 실험을 하러 지하로 내려가 암막 커튼 뒤에 숨으면 날씨를 즐기기란 더 어려운 일이 된다. 나는 문득 내가 청춘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연구실에서 방정식을 풀고 종 잡을 수 없는 전자의 움직임을 상상하고 어두운 방에서 레이저의 궤적을 좇는 사이, 삶의 찬란한 부분들이 나를 지나쳐 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는 내게 언제 또 미국에서 살아보겠냐며 이곳에서의 삶을 즐기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정 모르는 속 편한 소리라는 생각에 속으로 입을 내밀지만, 결국 내가 다다르는 결론은 그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다. 내가 미국에 계속 살게 될지 한국으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때의 이 삶은 지금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금 이곳의 것들을 너무나 많이 저당 잡히는 것도 그 나름대로 문제다.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보게 된다. 물론 이 지역에 사는 한국인들도 꽤나 있겠지만, 역시 관광으로 온 사람들은 딱 보면 티가 난다. 여기 사는 한인들의 표정은 일상의 심드렁함이 묻어나는 반면, 관광객 한국인들은 표정부터 다르다. 여행의 즐거움과 설렘으로 가득한 표정, 그리고 돌아다니기 편한 옷차림. 나는 그들의 그런 분위기가 약간은 부럽지만, 어쨌든 그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타지에서 같은 한국인을 보는 것이 반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들뜬 분위기를 은연중에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관광객들은 모녀가 함께 오는 관광객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커플이나 부부인데, 그들은 원래 뭘 해도 행복한 사람들이니 내가 그들의 행복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로부터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두 번째로 많은 부류가 바로 엄마와 딸이 오는 경우인데, 모녀관계에서 오는 끈끈한 유대감과 신뢰, 행복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다. 확실히 엄마와 딸 사이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물론 부자가 함께 오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 같기는 하지만, 여태 그런 경우는 시내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