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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May 01. 2020

둘과 모두의 이야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과 시대에 대하여

사랑은 둘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둘만의 서사가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이지만, 동시에 그 둘을 둘러싼 시대가 그 사랑을 함께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다. 어떤 개인도 시대를 초월할 수 없듯, 어떤 사랑도 시대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재즈 시대의 뉴욕이 사랑을 비극으로 만들었고,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사랑 이야기에서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콜롬비아의 문화적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옛 고전들을 향해 멀리 갈 것도 없이, 샤젤의 <라라랜드>가 그리는 사랑 이야기는 오늘날 헐리우드로부터 빚을 지고 있다. 이렇듯 사랑은 때로 시대에 도움을 받기도, 때로 시대와 마찰을 빚기도 한다.


내가 앞서 실패한 사랑담만 늘어놓았던 것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사랑이 예술이 되려면 그 사랑이 실패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조금 다르다. 사랑이 시대와 부딪힐 때 나는 마찰음으로부터 사랑은 예술이 된다. 어떤 사랑은 그 마찰로부터 마모되거나 깨지고, 어떤 사랑은 그 마찰을 이겨내고 장작에 불을 붙이는 부싯돌이 된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 마찰의 순간에서 비롯된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한국 사회의 특이점, 1997년

한국 현대사는 1997년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했던 조부모의 세대는 그들의 노후를 잃었고, 직접적으로 그 파도에 휩쓸린 부모의 세대는 적자생존에 내몰렸고, 그리고 그 아이들의 세대는 스스로와 부모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97년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운명에 처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받은 PTSD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환자들처럼 한국인들의 사고는 97년이 남긴 것들에 의해 결정됐다. 때문에 97년은 한국 사회의 특이점이고, 한국은 그리고 한국인들은 절대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즈음 20대 초반을 겪은 75년생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미수에게는 부모가 없고 다만 언니가 있을 뿐이었다. 현우는 어렸을 적의 사고로 소년원에 다녀왔다. 그들에게 97년의 파도는 누구보다 아팠을 것이고 그 파도를 넘어오기가 남들보다 어려웠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화는 그들의 어려움을 때로는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현우는 자신을 소년원으로 보냈던 사고의 그림자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어려워한다. 미수는 삶의 갈림길마다 안정된 길만을 택하는, 그러나 대신 스스로의 마음을 억누르는 선택을 한다. 영화는 그들이 처음 만난 1994년부터 사랑의 결실을 맺는 2005년까지 11년 동안의 삶을 이야기한다.


11년 동안 그들은 여러 번 만나지만, 그때마다 현우가 소년원으로 다시 들어가거나, 군대로 가거나, 연락처를 잃어버리는 식으로 헤어진다. 영화가 자주 비판받는 지점 중 하나는, 그들이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그 과정들이 너무 우연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그들이 처한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연에 기대지 않고서는 그들이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만약 미수와 현우가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끊임없이 헤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시대는 그들을 끊임없이 갈라놓고, 사랑은 그들을 끊임없이 붙여 놓는다.



우화로서의 미수-현우 이야기

앞서 1997년이 한국인들에게는 특이점과 같은 해였다고 말했다. 97년 이후 청춘은 늘 불안했고 위험했다. 그 해로부터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시대마다 어떤 연인들은 매번 현우와 미수가 겪은 일들을 겪어 왔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2020년에도 어디선가는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열의 음악앨범>은 97년 이후 모든 연인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될 고난을 상징하는 일종의 우화가 된다 [2].


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익명의 미수-현우들에게는 그들을 끊임없이 붙여 놓으려는 사랑보다 그들을 끊임없이 갈라놓으려는 시대의 힘이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영화이므로 1994-2005년의 미수와 현우에게는 여러 차례의 우연이 허락됐고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끝났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영화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또는 우리가 영화로부터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오늘날을 다루는 영화는 인물이 시대와 갈등할 때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한다. 봉준호의 <기생충>이나 이창동의 <버닝>처럼 인물을 죽여버리거나 파국으로 몰고 가는 '현실적'인 선택, 또는 정지우의 <유열의 음악앨범>처럼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마저 감수하는)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인물을 해피엔딩으로 데려다주는 '이상적'인 선택. <유열의 음악앨범>이 <기생충>이나 <버닝>과 같은 눈부신 영화적 성취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분명 이 영화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겐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행복한 사랑의 약속을 할 때, 그것은 영화적 허구여도 누군가에겐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준다. 그 앞에서 영화의 약속이 거짓을 약속하는 기만이라고 비난을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사랑의 모든 면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연인들은 항상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연인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비록 시대와 마찰할지라도.


그 지점에서 영화는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1,245,532명 중 단 1%에게라도 닿을 수 있는 영화라면. 미수와 현우처럼 시대를 이기고 다시 만나게 되는 연인이 한 쌍이라도 있다면.



[1] 영화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정지우 감독의 인터뷰 두 편을 링크로 남긴다. (노컷뉴스, 씨네21)

[2] 시니컬한 사족이겠지만, "모든" 연인들의 우화라고 말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틀렸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익명의 미수-현우들이 겪는 어려움을 동시대의 다른 누군가는 모르고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어려움이 누군가에겐 삶의 디폴트인 세상,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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