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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Sep 26. 2020

짝사랑의 메타포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한 세계에 사는 내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사랑할 때, 다른 세계에 사는 그 이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나와 누군가가 우연히 알게 되어야 하고, 서로에게 동시에 호감을 느껴야 하고, 연애를 하기 위한 각자의 상황까지 맞아야 사랑이 이루어진다. 만약 결혼까지 고려한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이쯤 되면 사랑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경제적 문제까지 개입되는 복잡한 문제로 커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의 각 단계마다 암초는 무수히 많은데 어떻게든 사랑을 이루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사랑은 무엇인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게끔 하는 힘은 무엇인지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놀랍게도 남자 셋, 여자 셋 모두 짝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그런가 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도 있다.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서로 엇갈리는 짝사랑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앞으로 극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주연 두 명(송아, 준영) 사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랑이 쌍방이 아닌 일방이다. 준영을 좋아하는 정경, 정경을 좋아하는 현호, 송아를 좋아하는 동현, 동현을 좋아하는 민성. 시간대를 뒤로 돌려보면 짝사랑은 더 많아지는데, 송아는 동현을 좋아했고, 준영은 정경을 좋아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그 긴 사랑의 끈들은 결코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직조되는 법 없이, 늘 서로를 향해 평행을 그릴뿐이다.


짝사랑의 정의를 더 넓게 가져간다면 문제는 더 깊어진다. 음악가인 네 인물(준영, 은빈, 정경, 현호) 모두 자신의 전공인 음악과 짝사랑 중이다. 분명 준영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그려지지만, 그의 커리어가 주춤하고 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다. 기대만큼 크지 못한 왕년의 천재 소녀라고 불리는 정경, 서령대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음악계에서 결코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지 못 한 현호, 그리고 누구보다 바이올린을 사랑하지만 과에서 늘 꼴찌였던 송아까지.


짝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들며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수한 짝사랑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결국 닿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사랑과 욕망 사이

어쩌면 음악계는 무척 잔인한 곳일지도 모른다. 좁은 사회여서 이런저런 소문이 무섭게 퍼져나가는 곳이라는 점에서 무섭기도 하지만, 음악계 안에 있는 이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소위 '급'을 나눠서 바라보기 쉽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물론 이는 학벌이나 직업 등으로 사람의 급을 나누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 경향을 따라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음악, 체육 또는 학문과 같은 분야에서는 급이 매우 객관적이고 자동적으로 나뉘며, 그 급이 국내를 너머 세계적으로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사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음악가 사인방은 모두 대단한 능력자임에 분명하다. 일단 넷 모두 현실에서의 서울대에 해당하는 서령대 음대를 나왔고, 준영-정경-현호는 유학 생활까지 했으며, 준영은 쇼팽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까지 한 세계적 피아니스트다. 그렇다고 정경과 현호의 커리어도 무시할 것이 아닌데, 분명 그들은 준영 급의 음악가는 아니지만 국내 최고 음악 대학의 교수직을 노려볼 만한 커리어쯤은 가지고 있다. 물론 음악계에서 송아의 커리어가 나머지 세 인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조차도 서령대 경영대/음대 출신이고 가정환경도 유복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음악계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 준영-정경-현호 모두 자신의 재능에 부족함을 느낀다. 준영은 분명 세계적 레벨이지만, 그렇다고 세계 최고는 아니다. 정경과 현호는 분명 국내 최고에 가깝지만, 세계적 레벨은 아니고 그들만 한 음악가들은 국내에 여럿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남들도 안다. 준영-정경-현호 셋 중 아무도 음악을 하면서 행복하지 못하다. 아니, 그들은 행복하지 못 한 정도가 아니라 음악을 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피아니스트 준영이 말한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죠" "음악을 안 했으면 분명 더 자유로웠을 거예요." "재능은 없는 게 축복이죠. 나한테도 재능이 없었더라면 모든 게 더 나아졌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주 자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은 뉴욕에서 공연을 하는 준영을 보며,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게 된 준영에 질투를 느낀다. 첼리스트 현호는 정경이 지원하는 서령대 음대 현악 전공에 자신도 지원한다. 그 자리를 잡아야 준영과 정경과 비슷한 위치에 겨우 설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들은 음악을 사랑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바쳐, 심지어 자신의 행복마저 바쳐 음악을 하는 것일 테다. 만약 음악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들은 진작에 음악을 버리고 다른 일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왜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기쁘기보다 음악으로 인해 슬픈 것일까.


다닐 샤프란이 연주하는 브람스의 엄숙한 노래 4번 <내가 인간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성경에서 다음에 나오는 말은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이다.

나는 이 물음에 대답하려고 스스로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나도 준영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는 그저 먹고살려고 하는 거죠. 무슨 죄를 지었길래 미국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물리를 안 했으면 더 행복했을 텐데."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준영의 대사에 깜짝 놀랐다. 내가 평소에 투덜대는 말들과 너무 비슷해서. 물론 내가 준영 급으로 뛰어난 월드클래스 물리학자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분야에서 나름의 위치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물리학을 사랑하고 이것 이외의 것을 업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가끔 물리로 인해 행복하고, 자주 물리로 인해 불행하다.


이것은 내 오랜 질문이었다. 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불행한 것일까. 수많은 밤을 고민한 끝에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답은,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 더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 물리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다른 직업적 또는 물질적 가치에 대한 욕망.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랑에 부수되어 오는 욕망이었다.


사랑과 욕망은 결코 갈라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가면 늘 욕망이 따른다. 또한 욕망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 욕망의 애끓는 면이 없으면 어떻게 그 어려운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인물들이 아파하고 불행한 것 또한 그들의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대상(그것이 사람이든 분야이든) 앞에서 어떻게 행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결국, 사랑

덕수궁 돌담길 앞 준영과 송아

작품은 이 물음에 나름의 답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성공한 사랑의 관계인 준영과 송아의 모습이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작품의 대답일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도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음악계에서 도는 소문들과 급을 나누는 수많은 입들, 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상대방과 나의 차이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 장애물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모티프를 따온 작곡가 브람스는 그가 사랑했던 클라라 슈만이 죽은 직후, 그리고 자신이 죽기 1년 전 <네 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ange, Op.121)>라는 곡을 썼다. 네 곡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원래 가곡으로, 성경에서 가사를 가져왔다. 이 곡을 쭉 들어보면 1번부터 3번까지는 죽음과 고통을 슬퍼하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하지만 마지막 4번은 나머지 세 곡과 미묘하게 톤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슬픔 가운데에서 약간의 희망적인 느낌이 돈다. 마치 슬픔을 위로하듯이. 4번의 가사는 성경 코린토 첫째 서간 13장에서 따온 것인데, 핵심 메시지는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3장 2절)이다.


나는 브람스가 <네 개의 엄숙한 노래> 마지막 곡을 통해 전하는 말이 사랑과 욕망, 그리고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나도 그 답을 분명히 알지는 못하지만, 안갯속에서 먼 곳의 불빛을 보듯, 결국 사랑이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결국, 돌아 돌아 다다르는 곳은 사랑. 아마도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말하고, 요하네스 브람스가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는 그것.



[1] 제목조차 그렇다. 1번은 "인간의 아들들의 운명이나 짐승의 운명이나 매한가지다" (코헬렛 3장 19절), 2번은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코헬렛 4장 1절), 3번은 "죽음이여, 고통스러운 죽음이여" (집회서 41장 1-2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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