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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Feb 08. 2021

2020년 독서 결산

예술과 나날의 마음

2020년 23권, 매월 1.9권 읽음

올해의 책 : "예술과 나날의 마음" (문광훈)


작년은 모두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해였다. ('방역'에만 초점을 둔다면) 성공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의 코로나 대처와는 달리, 미국은 방역이라는 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팬데믹을 그대로 맞았다. 나도 2020년을 떠올리면 집에 머물렀던 기억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일개 카운티의 일일 확진자 수가 한국의 일일 확진자 수보다 많은 상황이니, 장을 보러 나가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일상생활마저도 불안했다. 여름까지는 아예 학교가 문을 닫아 연구실에 나가지 못했고, 여름이나 되어 연구실에 나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런 상황이니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연구실에 나가 실험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작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독서 결산이니 독서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작년 한 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막상 그 시간만큼 독서량은 늘지 않았고 오히려 줄었다. 이로부터 내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 알 수 있는데, 일 이외의 것을 하면 불안해지기 쉬운 포닥이라는 직업 특성 때문인지, 일이 삶을 상당 부분 잠식했던 것 같다. 코로나 이전에는 출퇴근 시간이 물리적으로 일과 삶을 분리시켜주었다면, 코로나 이후에는 딱히 그런 것이 없으니 일과 삶이 엉망으로 뒤섞이지 않나 싶다. 그러다 보면 여유를 내어 책을 읽기보다는 새로 나온 논문을 읽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와중에 문광훈의 <예술과 나날의 마음>을 접한 것은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술을 주제로 삶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고 있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여러 번 읽고 싶을 만큼 수려하고, 문장의 수려함 만큼 그 문장을 낳은 생각의 깊이가 놀랍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렇다.

지금 여기의 삶에서 여기를 넘어 더 좋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일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신적인가. 관조란 신적 삶을 닮아가는 가장 행복한 길이 아닐 수 없다. 샤르댕의 정물화가 우리로 하여금 반성하고 관조하게 한다고 해도, 그래서 관조가 때때로 신적 차원까지 느끼게 하는 행복한 일이 된다고 해도, 그 출발점은 여전히 일상이다. 일상은 언제나 단순소박하다. (pp.114-115)

이 책의 미덕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관조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으로만 침잠하기가 쉬운데, 저자는 예술에 대한 관조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외부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는 샤르댕의 정물화를 '거의 조용한 혁명'이라고 칭한 메트켄의 말을 인용하며 가장 내밀한 회화 장르인 정물화와 정치, 윤리적 실천을 연결한다.

아마도 예술의 혁명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식이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지극히 흔해빠진 것들에게 흔치 않은 지위를 부여하고, 잊히고 억눌리고 외면당한 것에는 그에 합당한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만치 그것은 눈에 띄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세적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사소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근본적으로 평등할 수밖에 없는, 또 평등해야만 하는 현존적 권리를 복권시켜준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활동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치, 윤리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은, 적어도 참된 예술은 눈에 띄지 않는 현실 변혁의 혁명적 시도인 것이다. (p.124)


미국이 백신을 접종하기는 시작했지만, 아마 적어도 반년은 작년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일수록 문광훈의 책으로부터 얻는 깨달음은 무척 귀하다. 삶을 어떻게 관조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즐겁고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신적"으로 나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야 하는지, 또한 그것이 개인적 영역을 너머 어떤 영향을 가져야 하는지. 나는 이런 깨달음이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무너진 내 삶을 회복하고, 도리어 그것이 내가 준비 중인 일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길 바란다. 특히 이런 역병의 시대에는.



2020년에 읽은 책 리스트

디디의 우산 (황정은)

20 VS 80의 사회 (리처드 리브스)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엔도 슈사쿠)

제국대학의 조센징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침묵 (엔도 슈사쿠)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 (레이먼드 챈들러)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고든 마리노)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김남순)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박상영)

어렵지만 가벼운 음악 이야기 (마르틴 게크)

세상의 주인 (로버트 휴 벤슨)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엔도 슈사쿠)

불평등의 대가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조용한 삶의 정물화 (문광훈)

예술과 나날의 마음 (문광훈)


지난해의 독서 결산들

2009년 읽은 책들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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