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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Sep 27. 2023

형사 박미옥 - 박미옥

형사 박미옥

박미옥


한국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수식어만으로도 이 사람의 삶을 다 봤다고 해도 될까? 이미 이 타이틀만으로도 얼마나 고된 생활을 했을지,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 얼추 짐작했다고 생각했는데, 형사 박미옥은 오히려 희망과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악인의 잔혹함에 대해 읊기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보통의 마음, 선한 사람들의 선한 행위에 대해 더 많이 써내렸다. 여성으로서 겪는 직장내 성차별도 분명히 짚어내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한 사람의 '형사'로서의 일기에 집중했다.

그런 것들이 퍽 좋았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형사, 늘 발전하고 배우는 형사, 편견에 지지않고 또 스스로도 편견을 갖지 않은 시각으로 사건을, 또 사람을 바라보려고 하는 형사.

형사를 다룬 수많은 미디어들 속에서 의로운 형사는 대게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니, 형사의 대부분이 남자였다. 사실 현재도 실제 형사 성비를 살피면 남자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간간히 등장하는 '여형사'의 모습은 형사라기보다는 트로피 내지는 장식용 인형처럼 그려지곤 했고, 어색한 성비 구색 맞추기로 어쩔수 없이 끼워 넣은 맞지 않는 단추와 같았다.

<형사 박미옥>의 에세이를 읽으며 미디어에서 봤던 그저 그런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는 '여형사'의 이미지가 흐릿해지고 좀 더 선명한 '형사'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남자 못지 않게'라는 수식어따위가 필요 없는 '멋진 형사' 그 자체였다.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형사일을 했던 박미옥의 마음을 닮고 싶어졌다. 비관이 아니라 낙관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만 그렇게 오래도록 형사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나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비관, 증오로 생각의 고리가 쉽게 이어질 것 같았지만, 형사 미옥은 그러지 않았다.


P. 60. 형사, 감성으로 한다는 말은 개인으 감상이나 주관으로 일에 덤벼든다는 말이 아니다.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의 눈물과 탄식을 기억하고, 그 감정에 깊이 공감하며 일한다는 뜻이다. 범죄로 황량해진 폐허에서도 끝내 다시 복원되고야 말 삶과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일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희망을 갖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형사로서 만난 사람들 중에, 어려운 일을 겪고도 끝끝내 버텨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봐왔기 때문이고, 또 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며, 그 사람들에게 힘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10대, 20대 시절의 나는, 아니 30대 초반까지의 나는 사람에 대한 낙관을 가지지 못했다. 내가 가진 모든 번뇌의 시작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 게 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와중에 희망을 잃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꿋꿋하게 제 자리에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의 빛을 보며 나도 힘을 내보려 한 적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종종, 쉽게 비관에 빠져들었다.

아직도 어리다면 어린(?) 나이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절망에 빠지게 하는 사람들보다, 절망에 빠진 나에게 기꺼이 손 내밀어주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게 앞길을 비춰주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더 많다.


P. 221. 그러나 이런 세상일지언정 인간이 지겹거나 환멸스럽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도 사람이 주는 희망을 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도 사람들이 주는 희망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서인지, 책에서 말하는 사람들 속의 희망에 괜시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의식적으로 밝은 쪽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하지만.


아직도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나에게, 형사 박미옥은 먼저 지나온 자리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우리 모두 이렇게 어른이 되었어, 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해준다. 형사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짚어주는 조언들은 모두 따스하게 마음에 자리잡는다. 애써 외면해왔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기도 했다.

P. 294. 인간은 결국 자신의 핵심 감정과 마음의 소용돌이를 이해하고 풀어가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서로에게 각자의 꼴이 있고, 감당해야 할 고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롭고 건강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나는, 무책임하게 악의를 쏟아내는 사람들, 자신의 열등감을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드러내는 사람들,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혐오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사람들마저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옳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각자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는 이 사람들을 내가 모두 끌어안고 보듬어야할 필요는 물론 없지만, 그래도 인정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 또한 인생의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인 것이군요.

이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에는 참 미성숙한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조금 더 어릴 때 이 책이 나왔다면, 이 책을 읽었다면, 그러니까 늦어도 2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나는 형사가 되기를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형사 박미옥을 롤모델로 삼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물리적) 힘을 보태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게 되었을지도.

P. 122. 당신도 부디 오늘은 살아 있어주길 바란다. 어제의 상처에 짓눌리지 말고 내일의 불안에 무너지지도 말고, 계속 지금 이 순간만은 살아 있자.

마지막까지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으며,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특히 한창 장래희망을 고심하는 청소년들이, 특히 여성 청소년들이 읽으며 꿈의 지평을, 선택지를 더 넓혀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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