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역사
킴 닐슨
무려 <장애의 역사>라는 어마무시한 제목에서 지레 겁을 먹었던 것과는 달리 책을 읽는 것이 아주 어렵지만은 않았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장애를 어떻게 정의해왔는지를 옛날 이야기 들려주듯 나열한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옛날 이야기 읽듯이, 그땐 그랬구나, 하면서 편안히 읽었다. 나름 의미를 찾아보려 애를 썼는데, 전반적으로 이야기 책이나 다름 없이 흘러갔다.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몇 년도 어디에 살던 누가 어땠더라, 하며 역사를 가볍게 훑던 이 책은, 7장과 8장에 다다르면 제 3자의 눈으로 보고 관찰한 역사서에서, 당사자의 시선에서 "우리는 이랬어"라는 경험담으로 분위기가 달라진다.
1장과 2장에서는 유럽의 식민지 침략자들이 미주 땅으로 오기 이전에 살던 토착민들 사회에서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와, 초기 식민지 시대의 장애의 정의를 다루었다.
토착민들은 현대 사회에서 정의하는 정신, 신체 장애를 '장애'의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에게 퍽 꿈같은 이상향의 세계로 느껴졌다. 신체에 장애가 있다면 신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며 공동체에 기여했고,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공동체에서 어우러져 지내며 상호 부조의 사회를 이루었다. 토착민 부족은 지역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음성 언어만으로 의사소통을 하지는 않았고 모두가 수어를 함께 사용하였기 때문에 농인들도 의사소통하며 살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P. 49. 토착민들은 몸, 정신, 영혼을 하나로 이해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표준적인 몸과 정신을 유연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공동체와 나눌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고, 공동체가 건강한 균형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서로 그 재능을 나누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유럽 식민지 침략자들이 모두 무너뜨렸다. 단순히 전쟁을 일으켜 토착민을 살육한 것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전염병들 때문에 면역이 전혀 없는 토착민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구가 급감하면서, 상호 호혜적인 관계망을 형성했던 사회를 구성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한편 이 당시 유럽계 이주민에게도 신체적인 장애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다쳐서 신체에 장애가 있을 수 있었고 보다 다양한 몸이 유연하게 공동체 속에서 기능했다.
3장에서는 장애의 개념이 인종차별과 함께 설명이 되며 노예제가 낳은 비극을 서술했다. 노예제 하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는 장애인이었다.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인들이 열등하게 태어났고 그들의 몸이 비정상적이고 혐오스럽다고 가정했는데, 노예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잔혹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례들이 설명되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시민'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시민권을 정의하기 위해서 장애의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4장부터 등장한다.
P. 106. 미국이라는 국가를 만드는 일에는 능력 있는 몸을 가진, 온전한 시민권을 체화한 사람들에 대한 법적, 이념적 설계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배제되었다.
특히 장애를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로 규정하면서, 이 시기에 노동을 하지 않았던 백인 여성, 자유인인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 노예는 장애인과 같이 분류되었으며, 이들은 재산권을 박탈당하기 일쑤였다.
이 시기에는 의료진 교육이 표준화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의사들이 점차 진단과 치료를 통제하며 장애의 정의를 의학적으로 규정지어 시민권의 상태를 결정하게 되기도 했다.
읽다보면 장애란, 결국 사회에서 무엇을 최선의 가치로 두느냐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본주의 가치를 최우선에 두었기 때문에 '임금 노동을 할 수 있는 몸'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만 나라를 구성하고자 했고, 새로운 이민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그런 검열을 거쳤다.
오늘날의 미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검열이 완전히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7장과 8장은 미국에서 장애인들의 권리 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장애를 '보살핌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사회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투쟁을 보며 한국에서 있던 장애 이동권 투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흑인민권운동과 연대하며 백인 장애인들로만 구성되었던 투쟁이 점차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 여성과 퀴어, 흑인과 연대하게 되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P. 279. 1990년 미국장애인법 제정으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축하하며 미국 장애의 역사를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다. 미국장애인법은 장애의 이야기로, 시민권의 이야기로, 사회 운동의 이야기로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장애인의 운동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권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랜 국가적 논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미국장애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초반에 흐린눈하며 설렁설렁 읽었던 것이 마지막 장에 다달아서는 눈이 번쩍 뜨이고 바짝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있는 저자의 경험담 이야기까지 읽으면, 미국 역사 속에서 장애인들의 투쟁이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어 서사적으로도 완결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한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며 착찹해지기도 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힘과 마음을 보탤 수 있는 길을 찾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으로 끝맺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