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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May 31. 2023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하재영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하재영


엄마라면 당연히 내 편을 들어줘야지, 엄마라면 당연히 사랑으로 나를 이해해야지, 엄마라면 당연히...

아주 오래도록 나는 엄마를 '엄마라면 당연히'의 틀에 끼워맞추려고 했었고, 그렇기에 늘 엄마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는 우리 엄마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왜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는 거지?

하재영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읽기 전 제목으로만 얼핏 유추했을 땐, 자식과 불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다가 종래에는 어머니를 이해해버리고 마는 딸의 이야기를 쓴 책일 줄로만 알았다. 마치 어린 내가 엄마와 반목했다가 이제는 엄마를 이해해버린 것처럼.

이 이야기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성의 이야기이고, 그 여성의 딸이 어머니의 삶을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듯 분석한 책이었다. 그래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결코 '어머니'란 없었다는 것을.


P. 119. '어머니다움'에 대한 정의는 일종의 신성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상적 어머니상은 신에 필적하기에 모든 어머니는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한다. 어머니가 '실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할 것이다.


모성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일 뿐이고, 누구에게도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러니까 '페미니즘'을 알게된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엄마를 이상적 어머니상과 비교하곤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엄마도 그저 인간일 뿐이고, 다만 나보다 먼저 생을 살았던 선배에 불과했다. 나를 낳았다는 이유로 나의 실패마저도 자신의 실패로 감당해야할 처지에 처한 사람이었다.

(물론 태어나고 싶어한 적 없는 나를 이 세상에 던져둔 존재를 향한 보편적인 원망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고서 나의 엄마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건 아니었다. 이 책은 하재영 작가의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구술한 것을 옮겨 적은 회고록이고,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 그의 삶의 기록이니 결코 우리 엄마의 삶과 같을 수도, 비슷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어머니의 마음과 생각, 딸에게 유독 더 가혹하게 굴었던 이유 따위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나는 퍽 유별난 아이였다. 학교 다니며 왕따를 당한 적도 있고, 늘 교우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엄마는 항상 내 탓을 했다. 네가 별난 탓이다, 네가 고집이 센 탓이다, 네가 애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생겨도 늘 내 탓을 하는 자존감이 낮은 아이로 자랐다.

돌이켜보면 늘 내 탓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지나고 나면 나에게 못되게 군 친구들이 내게 사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이야기를 최근 엄마에게 전했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우려고 했지, 나를 꺾으려고 했어. 그런데 나는 조금 꺾인 듯 다친 듯 보여도 결국 완전히 꺾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상처를 딛고 더 단단해진 것도 아니야. 그냥 뭐 그런 일도 지나서 내가 되었을 뿐이야.


P. 38. 지금도 생각한다. 더 평범해지고 덜 미움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가 잃은 것에 대해, 평범함이라는 언어가 소외시키거나 배제하는 정체성에 대해, 존중받지 못한 개별성에 대해, 모두가 같거나 비슷해지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낯선 존재로, 이방인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에 대해. 이제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평범함이 곧 행복함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결국 아무도, 아무것도 나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엄마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도 엄마가 되기는 처음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엔 그렇게 키우는 게, 그렇게 평범하게 자라도록 키우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지금도 '평범함'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이제는 나를 꺾어 평범함의 테두리에 가두려고 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미 엄마는 내가 가둬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 마모가 되어서 조금은 덜 유별난 사람이 되긴 했다. 어느 쪽에서 봐도 대충 사람 구실 하며 평범한 축에 속해 사는 사람.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보기엔 아직도 유별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우리는 화해를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역시 적당한 거리감이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도 엄마가 나를 옆에서 챙겨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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