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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Oct 13. 2023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 미야베 미유키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야베 미유키


대학교 3학년, 학과 전공 필수 과목으로 변영주 감독님의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변영주 감독님 수업은 학부생들에게 큰 인기였고 많은 선배들이 강력 추천 했는데, 그만큼 수강 신청에 경쟁자가 많이 몰리기도 했다. 운이 좋아서 수강 신청을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던 날은 손에 꼽고 수업 내용도 그다지 기억에 아있질 않았다. 하필이면 학생회장 임기를 할 때 들어서 학업에 소홀했던 탓이었다. (결국 내 잘못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기억나는 건 몇 가지 있다. 변영주 감독님이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굉장히 좋아해서 매 강의 마다 극찬(?)을 하셔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 사이에서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읽는 수가 늘었던 것과, 아마 기말 과제던지도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하나를 읽어야 하는 게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것 하나는, 그 학기를 마지막으로 강의는 당분간 맡지 않으며, 학기가 끝나는대로 새 영화 크랭크인에 들어갈 예정이며, 영화는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어떤 작품인지는 비밀이라는 것(이라면서 줄거리를 대충 얘기해 주셨는데 아마 읽어본 사람은 알 거라고.)

그리고 2년 후 내 생일이던(?) 3월 8일, 변영주 감독님의 <화차>가 개봉을 했다.


부끄럽게도 그때도 지금까지도 사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 책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도 리디북스에서 '대여'를 했는데 읽을 생각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어느 날 보니까 대여기간이 열흘 밖에 안 남았다는 안내가 적혀있어서 시작했을 뿐이었다. (분명 내가 대여로 구입했을 텐데 기억이 없는 건 참 이상하지.)

아무튼 그렇게 홀린듯 읽기 시작해서, (돈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다 읽고야 말았는데, 이 한 권을 읽었다고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한 권을 평해보자면 이야기를 꼬아서 쓰는 걸 좋아하는 작가같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는 세 가지 이야기가 단편 옴니버스처럼 엮여있는데, 사실은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괴담을 수집하는 '미시마야' 연작의 하나였다. 그 사실을 모르고 읽었으니 조금 더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번 시리즈에 수록된 괴담은 '주사위와 등에', '질냄비 각시'와 그리고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세 가지였다. 마지막 작품을 빼고는 제목에 중심 소재가 무엇인지 드러나서, 그래서 주사위랑 등에는 언제 관계지? 질냄비는 언제 나오나? 하고 궁금해하며 읽을 수 있었는데,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는 도저히 내용이 예측이 되지 않았다.


괴담이라고는 하지만 세 이야기는 각각 이미 알고 있던 갖가지 이야기 조각을 모아 새 이야기를 구성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주사위와 등에'를 읽으면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대번에 떠올렸다. 신들이 유흥을 즐기는 노름장과 신들의 목욕탕도 쉽게 겹쳐 보였고, 신들이 편안하게 쉬고 놀 수 있도록 요괴들이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청소하고 쓰록 닦는다는 점이나, 인간들은 불결하니 신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부분 같은 것들도 매우 닮아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는 일본의 오랜 구전 설화나 신화를 비탕으로 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겠지.

일본인들이 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과는 다르다는 것이 퍽 신기했다. 민속학 전공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설프게 아는 수준을 읊어보자면, 한국에서는 신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일본은 요괴나 귀신의 일종으로 여긴다고나 할까. 한국에서 신은 기복의 대상이라면 일본에서는 '나를 해치지 말아주세요'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어쨌든 '주사위와 등에'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주사위를 신으로 모시는 마을에서는 등에도 함께 신으로 모시는데, 등에에게 100번 물리며 저주를 하면 등에의 신이 들어준다고 한다. 모치타로의 누이는 그를 질투한 이가 등에를 통해 저주를 했고, 모치타로는 누이의 저주를 대신 받았는데, 저주를 내린 여자가 이를 알아채고 모치타로를 납치해 주사위 신의 노름 마을으로 납치해간다. (이 여자는 저주를 했기 때문에 등에가 되었다고 한다) 이 노름 마을에서 모치타로는 다시 현실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청소와 허드렛일을 하며 버티다가, 어느 날 이 마을이 붕괴하며 가까스로 살던 마을에 돌아오지만, 마을은 이미 없어진 다음이다.


'질냄비 각시'에서는 반면에, 처음에는 한국의 '우렁 각시'를 기대하고 상상하며 읽었다가 전혀 상관 없는 내용이 이어져서 조금 기겁을 했다. 한국의 우렁 각시는 가난한 노총각을 위해 밥도 지어주고 청소도 해주고 결국엔 결혼까지 해주는 아리따운 우렁 각시의 사랑 이야기라면, '질냄비 각시'는 딱히 총각을 위해 집안일을 해주는 건 아니면서 그와 결혼하려는 여자를 매섭게 질투하는가 하면, 결국엔 총각을 자신이 사는 곳, 그러나 인간은 살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버리는 무시무시한 집착 이야기다. (이런 집착도 사랑이라고 하면 이것도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는 같은 음차의 이름을 가진 우물(그러나 다른 한사를 사용하는)로 이어진 두 마을의 이야기였는데, 에도시대 판 좀비 이야기였다. 넷플릭스 시리즈인 '킹덤'이 금방 떠올랐던 이유는 이 '좀비' ('인간이 아닌 자'로 지칭되는)의 특성이 킹덤에 등장한 좀비들과 흡사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추울 때만 활동한다던가, 한낮에는 해를 피해 숨어 있다던가 하는 아주 사소한 부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킹덤'에서 따온 설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자연재해 같은 재앙을 피해 우물을 통해 새로운 마을로 온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인간이 아닌 자'처럼 눈이 흐려지고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가 죽고 마는데, 으레 괴담이 그렇듯 속시원하게 해결지점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읽는 동안에 미야베 미유키가 왜 이렇게 유명한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주 흡인력 있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없었고, 중심 이야기가 아닌 곁가지 이야기들이 많아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에도 시대'가 배경이라고 하니 생소한 단어들과 표현들, 특히 복식이나 머리 모양에 관한 묘사들이 많아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루아게라든지 후리소데라든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검색해가면서 봤는데 딱히 장면을 떠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괴담 자체에만 집중해서, 각 괴담과 유사한 우리 나라의 다른 이야기 혹은 일본의 다른 매체 이야기들과 비교하며 읽는 것은 퍽 흥미로웠던 지점이었다.


P. 12. 사람은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밝은 내용이든 어두운 내용이든 상관 없이.


이런 괴담 시리즈가 갖는 매력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경청을 한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쓴 것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읽듯. 우리 안에서 '이야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돌아볼 수 잇게끔 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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