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족들의 첫 캐나다 여행
딱히 부모님을 결혼식에 초대해야겠다거나 초대하지 말아야겠다거나 하는 어떤 선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부모님이 캐나다에 와본 적이 없었고, 동생이 같은 해 5월에 먼저 결혼을 하는 바람에 나와 (당시) 약혼자가 일주일간 한국에 다녀왔으니 동생 부부도 함께 캐나다에 오기 좋은 핑계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가족의 캐나다 여행이 계획되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딸의 결혼이니 당연히 간다’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토론토 시청에서 삼분뚝딱 결혼식을 결심한 이후로 나의 원가족이 한국에서부터 캐나다까지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결혼식과 피로연은 캐나다의 노동절에 맞춰, 프로포즈도 받기 전에 이미 정해놨으니 부모님과 동생 부부의 캐나다 관광 일정을 이벤트 전주로 할지 다음주로 할지를 정하기만 하면 됐는데 여자처자 결혼식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신혼부부가 될 우리에게도, 귀국 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가족들에게도 편할 것이라는 결론이 금방 내려졌다. 그리고 나도 그에 맞춰 회사에 휴가를 냈다.
엠비티아이에서 J냐 P냐를 따지면 나는 P쪽에 가까운 사람인데 그 근간에는 ‘통제 성향’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대로 100% 실행되지 않으면 매우 스트레스 받는 성향>이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경우까지 고려해 플랜 b, c, d … z까지 세워둔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빡빡한 계획을 세우고도 변수를 맞딱뜨려 당황하고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의 여행 계획은 늘 1. 목적지를 정한다. 2. 왕복 교통편을 정한다. 3. 숙소를 정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적당히 알아서, 정도였다. 계획이 없으면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으니까! (돌아오는 길에 변수가 생겨 비행기가 취소된다거나 하면, 그러니까 계획이라곤 딱 세 개 세웠는데 그마저도 계획대로 안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면 나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그런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가족의 토론토 투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완벽해야 했다. 특히 부모님께 “딸이 이국땅에서 이만큼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래서 가족이 도착하기도 전에 나름의 일정을 짰다.
요즘 같은 백세 시대에 고령이라고 분류하면 혼날 거 같은 갓 환갑을 지난 부모님의 체력을 과신하지 않기로 하되, 주어진 시간이 5일, 그 중에서 또 이틀은 결혼식과 피로연으로 정해져 있으니 실제로 관광이 가능한 건 3일 뿐이라 가능한 알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융통성’이었다. 실제 계획의 실행에 있어 어떤 변수든 스트레스 받지 않고 받아들여야겠다는 마음가짐. 부모님의 짜증과 시비와 틱틱거림과 칭얼거림 모두 안고 가야한다는 단단한 다짐도 함께였다.
이 다짐은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나를 아주 튼튼하게 지탱해 주었다. 덕분에 미리 계획한 대로 일정이 잘 풀리지 않았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는데, 이게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도 되는 거 같아서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가족 여행을 가면 독불장군 K-가부장인 아빠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짜증을 가족들에게 풀곤 했는데, 그 시절의 나는 아빠의 짜증을 풀어주고 달래주려하기 보다는 똑같이 맞서 싸워 기를 꺾으려 했고 결과적으로는 누구의 기도 꺾이지 않고 상호 기분만 상하는 여행으로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이제는 아빠랑 기싸움을 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가리‘가 생겼고, “아빠는 절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체념도 더 견고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는 엄마와 아빠의 감정 상태, 태도를 한 발 떨어져 분석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게 정말 컸다.
내가 없을 때도 가족끼리 관광을 할 수 있도록 추가금을 내서 렌트카의 두 번째 운전자로 아빠를 등록해두었는데, 운전을 잘 한다는 알량한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아빠의 운전 의지가 꺾인 건 순식간이었다. 셋쨋 날 시내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주차장을 나오려는데 주차장 정산 시스템 사용 미숙으로 출차하지 못하고 막힌 일이 있었다. 내가 운전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주차 정산 단말기로 사람을 호출해 통신기로 해결을 해서 금방 나올 수는 있었지만, 아빠는 영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기가 팍 죽은 거였다. 그리고 이는 곧 가족을 향한 짜증으로 이어졌다.
토론토 여행에서 아빠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은 절대적인 외국인 노약자였다. 자신감은 빠르게 곤두박질 쳤으며 일 분 일 초가 다르게 아빠의 얼굴은 폭싹 늙어가는 거 같았다.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나오는 말마다 가시가 콕콕 박혀 있었는데, 자신의 쪼그라든 자아를 그런 태도로 드러내는 아빠의 모습이 퍽 못나 보이면서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아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빵긋빵긋 웃기 시작했다. 아빠의 자신감을 회복시켜줄 수는 없어도 통제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부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고 기분을 환기시키는 것,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었다.
“아빠, 그래도 나 막 영어로 사람이랑 싸워서 이기는 거 짱 멋있지 않았어?”
이 방법은 퍽 잘 먹혔고 아빠는 금세 나를 따라 웃었고 분위기는 한결 편해졌다. 짜증도 쏙 들어갔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진짜였다.
과거의 여행은 부모님에게는 익숙한 - 자녀에게는 낯선 곳으로 향하거나, 적어도 부모님에게 결정권과 통제권이 있어 그들에게는 비교적 ‘덜’ 미지의 탐험이었다면, 우리가 자라며 어느 순간 새로운 땅에 정착을 하면서 이 관계는 역전이 된다. 그렇게 나에게는 익숙한 - 그러나 부모님에게는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우리 가족의 ‘외국인됨’을 시시각각 맞딱뜨려야 하는 것이다. 특히 통제권이 넘어가 어쩔줄 몰라하는 가장의 모습을 어떻게든 다독여야 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이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부모님의 새로운 모습을 재발견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들의 과거 그 행동이, 그리고 지금의 그 못난 모습이 폭력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기도 하며) 제 아내를 챙기느라 부모님에게 신경을 끄고 여행을 즐기기 바빴던 재수없는 남동생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 그나마 아빠랑 달리 네 아내라도 잘 챙겨서 다행이구나.) 더불어 이 가족을 한결 편안하게 감내하는 방법을 숙지하는 시간도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여행을 통해 한국 어르신들에게 토론토에서는 나이가라만한 관광지도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여행의 피로도가 쌓이기도 전에 공항에서 곧바로 나이아가라로 향하는 일정으로 짠 것이긴 했지만, 정말이지 그 이후로 갔다온 아웃렛이며 토론토 센터 아일랜드, 세인트 로렌스 마켓, 그리고 디스틸러리 디스트릭트와 CN 타워까지, 그 어떤 것도 부모님의 인상에 깊이 남지 못했다. 부모님은 결국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나이아가라가 제일 멋있더라.”는 말 밖엔 안 하셨는데 한국으로 돌아가 친척들을 만나서도 내내 그 이야기만 하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돈 많이 든다, 뭐하러 그런 것까지 하느냐고 투덜대던 부모님의 입술이, 나이아가라 페리를 타고 폭포 바로 아래까지 다가가 흩뿌려지는 폭포수를 맞고, 폭포 뒤로 이어지는 미끄러운 터널을 지나 폭포수가 바로 옆에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는 연신 “우와”를 내뱉기 바빠졌다. 더불어 부모님의 손은 카메라로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기 바빠졌다. 감탄과 즐거움, 벅찬 행복이 그들의 얼굴에 걸리는 걸 보면서, 이 맛에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자주 들여보지는 않더라도 순간 포착의 사진이 아니라 생생한 동영상으로 이따금 그 당시를 다시 돌려 보며 그들의 목소리와 생동감 넘치는 표정, 들뜨고 부푼 마음을 더 현실감 있게 회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트위터에서던가, 어떤 사람이 해외 이주를 했다가 한국으로 역이민한 이야기를 하며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앞으로 부모님께서 평균 수명이라는 여든까지 살 수 있다고 해도 20여 년 정도 더 사시는 건데, 매년 한국을 방문해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끽해야 스무 번이 최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부모님의 여생을 곁에서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던 말이었다.
처음 캐나다행을 결심한 시점에 나는 남동생은 물론이고 부모님과도 사이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이민에 성공해서 다시는 가족들 안 보고 살 거라는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민 준비 과정에서 “내가 이제 한국을 떠나면 앞으로 영영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니까 지금 있을 때 좀 잘 해주지 뭐.”하는 태도로 가족들을 대하니 신기하게도 관계가 금세 애틋하고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이제는 통화도 더 자주 하고 미운 말 날선 말 보다는 사랑한다 보고싶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남은 생을 함께 곁에서 보내고 싶은지를 물어본다면, 그립고 보고싶은 것은 맞지만 때때로 참아내야 할 깝깝한 상황을 몇십 년 더 견디며 지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니까 딱 이정도의 거리감이 우리에게는 알맞는 거라고, 부모님과 나는 말하진 않았어도 그렇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누구네 딸이 자기 엄마랑 뭘 했네, 엄마는 나이들면 딸이 옆에 있어야 하네, 하는 말을 계속 하지만…. 정작 내가 엄마 옆에 있게 되면 엄마는 계속 내 뒤치닥거리를 하며 살게 될 걸 모르시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하시는 걸까.) 그리고 원래 자식을 키우는 최종 목표가 자식의 독립이 아니던가. 독립된 개체로 부모와 떨어져 내 삶을 잘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는 0에 수렴한다.
가족들과의 여행, 결혼식과 피로연을 마치고 부모님을 공항에 배웅하면서까지, 긴장과 행복, 걱정과 즐거움이 내내 뒤섞여 있었다. 마침내 게이트 너머로 손 흔들며 들어가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눈물을 훔치며 (물론 게이트 들어가기도 전에 엄마랑 서로 부둥켜 안고 엉엉 울기도 했지만)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이 흘러 넘쳤다. 계획대로 다 되지는 않았어도, 아무런 사고 없이 누구도 싸우거나 기분 상해서 굳은 얼굴로 내내 있던 게 아니었던 비교적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또 가족 여행이 하고 싶냐, 부모님을 캐나다로 초대하고 싶냐하면, 솔직히 글쎄, 부모님을 감당할 자신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경험치가 쌓인 만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안다. 이런 게 바로 성장이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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