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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6. 우당탕탕 영주권 신청기 (3) - 기다림의 끝, 드디어 영주권!

by 희연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Season 2

6. 우당탕탕 영주권 신청기 (3) - 기다림의 끝, 드디어 영주권!


허겁지겁 서류 접수를 끝내고 한숨을 돌렸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 뿐이었다.

통상적으로 서류 접수가 되면 신체검사와 바이오메트릭스를 하라는 안내가 한두 달 사이에 나오는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캐나다 내에서 영주권 신청을 한 사람들 중 캐나다 거주 기간이 5년 정도 되면 신체검사는 면제가 됐다. 이 사실을 나는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야 알았다.

서류를 접수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 바이오메트릭스를 하라는 이메일을 받았고 곧장 안내대로 진행했다.

그리고 기다림, 끝이 없는 기다림.


서늘한 봄이 지나고 활기 넘치는 여름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불길한 뉴스들이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 주변에 빠르게 스몄다. 영주권 점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고, 유학생이 졸업하면 받을 수 있는 워크 비자에 제한이 걸릴 거라고도 했고, 심지어 워크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 영어 시험도 쳐야 한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점점 이민의 문이 좁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캐나다도 연방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진보당과 보수당 너나 할 것 없이 나라에 닥친 경제 위기의 원인을 이민자들에게 돌리며 '이민 정책을 대대적으로 손보겠다'는 분위기를 풍겨댔다.

불안과 초조가 일상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하루하루를 더 충실히 살아냈다. 무사히 접수를 끝냈으니까, 그래도 캐나다 사람이랑 결혼을 했으니까, 나한테 영주권을 안 주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그 와중에 나보다 더 늦게 영주권 서류를 접수한 친구가 먼저 영주권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구는 영주권 점수가 고공행진이던 와중에 527점이란 고득점으로 영주권 인비테이션을 받았다. 혼자 진행했으면 더 높은 점수가 나왔겠지만, 비영주권자 남편과 함께 영주권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바람에 점수가 낮아졌다고 아쉬워하며 말할 때, 못난 질투가 먼저 솟았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향한 순수한 열등감.

친구는 (물론 나보다 많이 어리지만) 영어 점수도 만점으로 받은 데다가 경력 점수도 충분했고 다니던 직장에서 받을 수 있는 영주권 지원을 꼼꼼히 알아보고 나서서 챙긴 덕분에 기혼이라는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영주권을 따낼 수 있었다. 그에 비해서 나는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놓고 어중간한 영어 점수에, 결혼 영주권을 진행하면서도 기존 비자가 끝나기 직전에 얼렁뚱땅 접수를 해놓았고.

부끄러웠다.

캐나다 이민을 결심할 땐 절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했었다. 막상 유학을 오게 되면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영주권 따면 좋고, 아니면 한국 돌아가도 돼.' 하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었다. 여전히 영주권을 목표로 삼고 있긴 했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나는 쉽게 나태해졌고, 다 된 밥을 떠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내가 그렇게 넋 놓고 있는 동안에 친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해내고 있었다.

짐짓 어른스럽게 친구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내 일인 것처럼 함께 기뻐해 주긴 했지만, 내 속에 부글부글 끓는 열등감이 나에게 손가락질했다. 좀 더 열심히 살지 그랬냐고.


그러나 다행히도 못난 질투심이 폭발할 날은 오지 않았다. 영주권 프로세스가 진행되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새로운 인생 이벤트가 자꾸만 고개를 기웃대며 나를 바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9월 중순, 드디어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는 이메일이 이민성에서 날아왔다.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안내 없이 내 정보를 이메일로 써서 회신하라는 이메일이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신체검사가 면제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렴 이제 영주권에 진척이 보인다는 것으로 기뻐서 곧장 필요한 정보를 적어 회신을 했다. 포탈 1의 단계였다.

친구의 경험을 토대로 포탈 1을 거치면 영주권 받기까지 한 달이 걸릴 거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잘 풀리면(?) 내 인생이 아니겠지.

한 달이 지나도록 그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되지 않아서 다시 초조함이 밀려왔는데, 이게 웬걸, 같은 내용의 이메일이 다시 왔다. 아니, 지금 장난하십니까 이민성? 같은 내용의 답변을 다시 복사&붙여 넣기로 회신을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지, 지금 뭔가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2주 만에 다음 단계인 포탈 2가 열려서, 영주권용 사진을 업로드하고 영주권 카드를 받을 주소를 입력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서 영주권이 승인된 걸 확인할 수 있는 eCoPR이 나왔다.


eCoPR을 받으면 이제 어디 가서 '캐나다 영주권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캐나다 밖을 나가려면 약간의 제약이 있는데 비행기는 못 타고 육로로는 갈 수 있고, 비행기 타려면 별도의 서류를 더 준비해야 하고 뭐 그런 복잡한 규정이 있는 거 같았다. 그래서 대게는 영주권 카드 실물을 받을 때까지는 캐나다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eCoPR을 받은 뒤 약 2주에서 한 달 사이면 영주권 카드를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영주권 카드를 받고 나면 나이아가라 통해서 미국 국경을 건너 버펄로를 다녀올까, 하고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즈음 캐나다 전역에 '캐나다 포스트(캐나다 우체국) 파업'의 기운이 스산하게 돌고 있었다. 파업이 예고된 날은 내 영주권 카드가 발송될 것이라 예상되는 날이 지난 후였지만, 프로세스가 어떻게 밀릴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나도 놀랍지 않은, 캐나다니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가 포탈 2에 업데이트했던 영주권용 사진이 반려처리 되었다. 사진의 퀄리티가 나쁘다는 이유에서였고, 그리고 하필이면 그 사항을 확인한 것이 이사하는 날,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새로 사진을 찍을 곳을 찾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분명 영주권 접수할 때 송부한 사진 디지털 원본이 있을 텐데, 하며 이메일을 뒤져 겨우 새롭게 업로드할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사진을 다시 업로드하니 상태가 '검토 중'으로 바뀌었는데, 캐나다 포스트의 파업이 시작될 때까지도 도무지 승인이 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영주권 카드를 수령할 주소로는 이사 전의 주소를 기입해 두었는데, 이사가 완료되기 전까지 카드를 수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집의 계약과 이사를 나가기로 결정한 날짜까지도 한 달 여의 여유 기간이 있었으니까, 그전까지는 도착하겠지, 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캐나다 포스트의 파업은 길어지고 끝이 보이질 않았고, 재업로드한 영주권 사진의 상태도 승인으로 바뀌지 않고 영원히 '검토 중'에 머물렀다.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캐나다 포스트의 파업이 재개되었음에도 사진은 여전히 검토 중. 이미 이사한 집에서 석 달째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전 집의 집주인이 '네 앞으로 우편이 왔어'라며 메시지를 보냈길래 퇴근길에 우편물을 받기 위해 들렀다. 설마 영주권 카드일까? 하지만 사진은 아직도 '검토 중'이라고 뜨는데?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지금 이 시기에 캐나다 정부가 내 이름으로 보낼 우편물은 이것뿐이라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편물을 받자마자 뜯어봤다.


다행히 영주권 카드였다.

미국은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이민자들을 막무가내로 내쫓으며 캐나다와는 관세전쟁을 시작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고, 연방 선거를 앞둔 캐나다에서는 보수당 집권이 유력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던,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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