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캐나다의 대자연 (1) - 고래 관찰 관광
7. 캐나다의 대자연 (1) - 고래 관찰 관광
내 왼쪽 팔뚝에는 타투가 있다. 초승달과 고래가 어우러져 문장(紋章)처럼, 또는 도장처럼 새겨져 있다. 중 2때 보았던 만화책, ‘로즈 힙 로즈’라는 만화책에 허벅지 안쪽에 장미꽃 타투를 한 여고생 킬러가 등장하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타투가 아주 강한 이미지로 남아서 그 뒤로 나도 꼭 타투를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어떤 타투를 할 지는 모르지만 완전 섹시하고 야한 걸로다가 허벅지 안쪽에다가 해야지! 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타투를 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지만 ‘어떤’ 타투를 할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주 오래도록 숙고해서 고른 타투 도안이 바로 고래와 달이었다. 오래 고민한 것에 비하면 ‘달과 고래를 좋아하니까’라는 아주 심플한 이유로 고르게 되었는데, 어쨌든 이만 하면 나의 고래 사랑을 충분히 자랑한 것 같다.
캐나다 동부는 대서양과 맞닿아 있다. 동쪽 끝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서양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커다란 강을 이루는 퀘벡주에서도 바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더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래서 때가 되면 몬트리올 근교의 강에서도 고래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직장 동료에게서 듣고 고래를 보러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024년 여름, 드디어 그 한풀이를 할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부터 고래를 보러 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테마를 내가 정했으니 나머지 귀찮고 세세한 계획은 모두 영어 원어민인 배우자에게 떠넘겼다. 뭘 해도 내가 하는 것보단 비교적 쉽게 하겠지. 그리고 그는 비교적 잘 해냈다.
출발하는 당일까지 배우자는 나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름의 서프라이즈라나. 어쨌든 그 덕분에 네비게이션에 뜬 12시간이라는 운전 거리에도 주눅들지 않을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겠거니. (물론 중간에 두어 시간 내가 운전대를 잡아야 하기도 했지만)
토론토에서 출발해서 몬트리올을 지나고 퀘벡 시티도 지나서 마침내 도착한 곳은 타도삭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Tadoussac. 처음엔 이 단어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 헤매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제대로 발음하고 있는 건지, 한글로 잘 음차 해서 쓴 건지 알 수가 없다. 퀘벡주에는 그런 작은 마을이 굉장히 많았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느낀 것은 ‘바다 냄새’였다.
토론토 근교에는 바다가 없다. Beach - 나에게는 ‘해변’이라는 뜻 밖에 없던 단어가 토론토에 와서는 호숫가, 물가를 모두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난데 없는 충격이었다. 그런데 토론토에서 열두 시간을 운전해서 온 이곳에서 정말 해변다운 해변을 맞딱뜨리니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숙소에서 굽이 보이는 물가는 ‘세인트 로렌스 강’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대서양과 맞닿은 거대한 강 하구였기 때문에 충분히 바다처럼 느껴졌다.
본격적인 고래 관찰 관광을 하기 위해 간 곳에서는 바다의 정취를 더 짙게 느낄 수 있었다. 간조였는지 물이 조금 빠져 있는 것마저도 내 고향 거제도의 풍경과 향기를 떠올리게 하기 좋았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주변을 보여드리며 “나 지금 거제도에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하다보니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가 예약한 관광 상품은 12인승 고무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었는데, 그 덕에 고래와 더 가까운 곳까지 갈 수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돌아가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이 있었다. 고래를 발견한다고 해서 무작정 고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고 일정 거리를 떨어져서 멈춰 있어야 하는데 고래가 사람들 있는 쪽으로 오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탄 보트 근처로 고래가 다가와 주는 행운이 찾아 온다면 좋겠다는 생각과, 고래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는 절대 가까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 겸 설명을 듣고, 선착장에서 대여해준 옷들을 원래 입고 온 옷 위에 껴 입고 보트에 줄을 맞춰 올랐다. 설렘 반 걱정 반. 그렇게 두 시간의 보트 관광이 시작되었다.
운이 좋아서 우리는 보트 선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보트가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갈 때마다 차가운 강물인지 바닷물인지 잔뜩 얼굴에 끼얹어졌다. 혀로 낼름 핥아보니 확실히 짠 맛이 나서 “바다다!”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몇십 분을 그렇게 신나게 나아가던 보트가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육지가 거의 보이지 않는 한 지점에서 서서히 속도를 낮추더니 엔진을 끄고 멈추었다. 선장님이 열심히 다른 보트 선장님들과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고래가 보이는 지점을 분주히 찾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고래를 못 본다면 정말 많이 아쉽겠지만, 오랜만에 바다의 탁 트인 풍경, 시원한 하늘과 바닷바람의 짠내,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고요히 모두 각자의 생각에 빠져 먼 바다를 요리조리 살피던 그때, 선장님이 우측을 바라보라고 신호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잔잔한 물결 위로 분수처럼 시원하게 물줄기가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고래였다.
바람을 타고 고래의 숨소리가 내 귓가에 함께 들려온 것 같았다. 고래는 등을 해수면 위로 내밀고는 큰 숨을 내쉬고 다시 수면 아래로 살짝 숙였다가 또 다시 고개를 들어 숨을 푸푸 내쉬었다. 고래가 숨을 쉴 때마다 내 숨은 멎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도 방해될까봐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꽉 쥔 채 눈을 부라리며 고래를 보는 것에 집중했다. 비록 등짝밖엔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눈에 담기는 절경이 자그마한 핸드폰 화면에는 제대로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카메라까지 들고서 사진 찍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 1초라도 내 눈에 직접 쑤셔넣고 싶었다.
먼 발치서 보고 나면 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욕심이 크게 자랄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다. 충만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수족관이나 동물원에 갇힌 바다 생물이 아니라, 광대한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시원하게 숨을 내뱉는 고래들이 있다. 그들이 숨을 푸푸 내쉬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걸 본 것만으로도 내 인생의 큰 소원을 이룬 것 같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쓸 수 있겠구나.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자꾸 차올랐다.
고래 관찰 관광을 한 시간 가량 했을 즈음, 별안간 위기가 찾아왔다. 분명 보트에 오르기 전에 혹시 몰라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 혹시 몰라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갈증을 참아왔는데. 요의가 묵직하게 아랫배를 눌렀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곳은 망망대해. 12인승 보트에는 화장실도 없어 보였고, 남자 선장님이 요강 같은 걸 갖고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참아볼까. 한 시간 정도, 참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방이 찬란하고 넘치는 바닷물이었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 머릿 속은 몸안의 수분을 어떻게 배출할 수 있을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냥 지리는 게 나을까? 대충 바닷물 냄새에 섞여서 사람들도 모르지 않을까? 차에 여분 옷이 있으니까 뭍에 도착하면 재빨리 갈아입고 대여한 옷은 어떻게든 변상한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바다로 뛰어들까? 앞선 오리엔테이션에서 사람이 바다에 빠지면 원래 타고 있던 사람들을 우선 뭍에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올거라고 했으니까 바다에 한 시간 떠 있어야 할텐데. 물이 많이 차가우려나? 지리는 것보다는 바다에 빠지는 게 내 존엄을 지키는 길일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 배우자에게 “내가 바지에 지려도 너는 나를 사랑할거지?” 라는 질문까지 할 정도로 -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선장님에게 화장실을 쓸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답이 없을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임시방편 정도는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배의 후미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넓은 판이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일을 처리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두 번 생각 할 것 없이 곳바로 재킷과 고무멜빵바지를 벗어 던지고 후미의 발판으로 넘어가 쭈그려 앉았다. 내 몸에서 빠져나온 수분은 곧장 바다로 흘러가 하나가 되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참 보잘것 없었다.
모두 비워내고 한결 편안해진 방광으로 여유롭게 남은 한 시간을 마저 관광을 마칠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너른 바다와 해수면에 닿을 듯 말 듯 한 땀 한 땀 퍼져 있는 양떼구름의 조화는 이곳이야 말로 극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냥 모두 비운 다음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고.
아주 오래도록, 아마 죽는 순간까지 행복하면서도 조금은 우스운 기억으로 남을 날이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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