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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Jan 19. 2018

#72 <1987> 폭력은 연쇄한다

1987년과 2017년. 폭력은 하나의 시대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이뤄진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꿈속에서 과거로 돌아갔는데, 탄핵도 촛불집회도 일어나기 전이었단다. 허무한 마음이 들었는데 친구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 그래도 살아왔던 세상인데 또 못 살겠어? 무너질 정부는 언젠가 무너지겠지.'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며 평소처럼 집을 나섰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그 길에서 자기가 그간 직접 보거나, 들었거나 혹은 직접 겪었던 갑질들을 모조리 마주쳤다.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정권만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세상이 바뀌었더라. 고작 일 이년 전으로도 다시 돌아가라면 난 못 돌아갈 것 같아."


그러고 보니 고작 일 이년 전인 게 신기할 정도로 그땐 정말 그랬다. 사내 이메일로 해고 통보를 받은, 비정규직이었던 A에게 한 선배는 술자리에서 말했다."그러게, 새끼야 네가 무능하게 구니까 짤리지." 그 날 A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짐작컨데, 그는 그저, '내가 진짜 무능했구나' 하고 그 해고가 자신에게 합당한 몫이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B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밤마다 술집에서 서빙 알바를 했다. 한 중년 남자가 B의 허리를 만지면서 그녀가 '예쁘다'고 말했다. B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버리자 그는 불쾌(?)했는지 그녀에게 큰소리를 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B는 그날,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는 그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B를 성희롱으로부터, 갑질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어떠한 사회적 안전망도 없었다. "그러게 걔는 왜 술집에서 일을 하니? 그러니까 그런 일을 당하지." 고작 몇 년 전인데, 그 '시대'엔 정말로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당연한 듯 약자를 괴롭혔고, 다시 또 그들을 탓했다.



누군가는 그때를 폭력의 시대라 불렀다.


1987년도 하나의 시대였다. 누군가는 그때를 폭력의 시대라 불렀다. 그 누군가가 말하는 폭력의 시대는 독재정권이 폭력적이었고, 국가가 자성 없이 폭력을 가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시작한 폭력은 쉽게 연쇄하여 연쇄 고리를 만든어 사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다. 우선 육체의 폭력이 그렇다. 박처원(박처장)은 조반장에게, 조반장은 조사관에게, 그리고 조사관들은 대학생 박종철을 고문한다. 또 박처장이 조반장 같은 이들의 목을 조르면, 조반장은 그의 밑에 있는 말단 형사들을, 말단 형사들은 박종철의 유가족들, 혹은 연희나 연희의 어머니 같은 이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폭력은 단순히 육체적 폭력으로만 연쇄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실제 그 시대가 그랬듯), 시대의 폭력은 훨씬 더 다양한 측면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가해진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직업인들에게 윤리를 포기할 것을 강요한다. 의사에게 거짓 부검 결과를 보고하도록 강요하고, 검사에게 변사체 처리를 위해 강제로 도장을 찍을 것을 요구한다. 교도관 보안계장으로부터 면회 기록을 빼앗아 소멸시키고, 기자들에게는 보고 들은 것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사무실에 최루탄을 던진다. 개개인은 스스로의 직업윤리를 배반하도록 강요당한다. 나의 행위의 동기, 혹은 존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폭력은 가해진다. "월북자야, 애국자야?"라며 조반장에게 묻는 박처원은 조반장에게 애국자 혹은 월북자, 오직 그 두 개의 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을 강요한다(그러나 장소만 고문실로 바뀐다면 조반장이 박종철에게, 한병용에게, 수도 없이 강요했던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몸에 대한 주체성과 자율성도 폭력을 통해 빼앗긴다. 권인숙(영화에는 잠깐 언급된다)과 박종철, 그리고 한병용은 고문실에서 스스로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박탈당한다. 종철의 유가족은 종철이 죽어서도 그 시신의 손 한번 잡기 위해 국가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했다. 그 시대에는 그런 폭력이 일상처럼 이뤄졌고 또 당연하게 자행됐다.


연희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은 이런 폭력이 연쇄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연희의 말을 통해 추측하자면 아버지는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싸우다가 배반을 당하고 사장에게 부당하게 해고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연희의 물음은, 견고한 독재 정권이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폭력의 연쇄 고리가 너무나도 견고하게,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사회에서 좀처럼 쉽게 끊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재정부의 폭력은 그렇게 연쇄적으로 흘러 일상 속의 폭력으로 깊이 파고들고, 개개인의 삶 속에도 깊숙이 작용한다. 사회 전체가 그 폭력을 공유한다. 그렇기에 폭력은 정치라기 보단 한 시대에 더 가깝다.


"내래 빨갱이 잡는 거 방해하는 간나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간주하갔어."

흥미롭게도 영화 속 주요 안타고니스트(악역)는 전두환이 아니라 박처원이다. 왜일까? 박처원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기 보다 반공 분자들을 처벌하는 것에 더 의욕적이다. 세상을 오직 둘로 쪼개어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빨갱이'로 묶어서 잡아들이더라도 그토록 '빨갱이'를 박멸하고 싶어 했던 박처원은, 이 영화 속 폭력의 실제적 시발점이기도 하다. 언뜻 이 폭력의 연쇄 고리의 최상단에 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는 그의 이야기를 중후반부에 이르러 그의 입을 통해 발화함으로써 박처원 또한 그 폭력의 연쇄 고리 속에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박처원의 이야기를 통해 폭력은 정권을 지키려는 자뿐 아니라 이념 그 자체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박처원의 가족은 공산주의 실현이라는 거대한 이념 아래 어릴 적 가족처럼 거둬준 자로부터 '지주'라는 이름으로 몰살을 당했다. 스스로가 경도되어 있던 그 '위대한' 이념을 위해 소년은 저 스스로를 가족처럼 사랑해준 이들을 잔인하게 몰살하는 일을 열성적으로 행했다. 가족이 몰살당한 박처원의 분노는 그가 남한에서 '빨갱이'를 잡아넣고 그들을 고문하고 또 스스럼없이 죽이는 행위로 치환된다. 그의 과거 비극적 이야기로부터 영화 속 이 모든 폭력의 연쇄 고리의 시발점이 어렴풋하게 보이는데, 이념을 이용하여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 뿐 아니라 순수하게 이념을 믿는 자들 또한 섬뜩한 폭력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박처원의 이야기는 암시한다.


폭력의 연쇄가 그토록 견고하다면, 어떻게 끊어야 할까. 우린 어떻게 끊어왔을까. 우린 온전하게 끊어 냈던 것일까.


폭력의 시대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연쇄 고리를 끊어야 한다. 영화 <1987>은 각각의 위치에서 조금씩 그 고리를 끊어내는 사람들을 한 명씩 보여준다. 처음에 그 고리를 끊으려는 자들은 김정남과 한병용 같은 몇몇이다. 그러나 그토록 견고한 연쇄 고리는 한 두 사람이 끊는다고 끊어지지 않는다. 이 고리를 끊으려는 자가 오직 김정남과 같은 소수의 지도자뿐이었다면 6월 민주화 운동은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 기자들이 함께 나선다. 그리고 박종철의 사망을 확인한 의사가 연쇄를 끊는다. 폭력 속에서 침묵해야 했던 교도소 안계장 같은 인물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마지막은 '연희'로 대표되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의 변화한다. 연희의 첫 시작은 반독재 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을 '운동권'으로 낙인찍으며 외면한다. 그러나 이 사회의 폭력을 비디오를 통해 목도한 후에 삼촌이 잡혀하고, 삼촌을 찾으러 간 자리에서 자신과 자신의 엄마에게, 한열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을 직접 마주한다. 그 폭력의 연쇄고리가 자신의 삶에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더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영화 마지막 쇼트에서 광장으로 달려 나가는 연희는 시청 앞에 이르러서 거대한 시민의 물결에 도달한다.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그 연쇄를 끊어내고자 하자 마침내 폭력의 고리를 벗어던진다.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료하다. 이 폭력의 연쇄가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개개인이 다 함께 그 고리를 끊으려고 나섰기 때문이다.


다시, 2016년. ⓒ나눔문화


1987년의 시대를 살지 않았던 나에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자연스레 2016년 촛불시위로 연결됐다. 우리는 폭력이 연쇄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폭력은 연쇄하여 아주 깊숙이 우리의 일상까지도 들어와 있었다. 나는 지난 몇 년 간 수많은 A와 B를 만났었다. 콜센터 현장실습을 하던 청소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탈조선'을 꿈꿨다. 2010년대 '을'들은 삶의 곳곳에 있는 '갑'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런 우리를 광장으로 데려온 것은 일상까지 그늘지게 한 그 폭력의 연쇄였다. 그 연쇄를 끊어보겠다고 시민들은 직접, 광장으로 나왔었다. 그 발걸음이 우릴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러나, 우린 연쇄고리를 온전히 끊었을까. 6월 항쟁이 끝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다. 영화는 굳이 끝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이 영화 또한 1987년을 통해 2017년(이제 2018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난 촛불 혁명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금 11월의 항쟁을 겪었다. 시대는 바뀌었을까? 우리는 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할 수 있을까? 연쇄고리를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 변화된 시대를 만나긴 했지만 아직 그 이후의 길이 나에게는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들려오던 연희와 한열이 부르는 '가리워진 길'에 나는, 우리의 시대의 앞날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 노래 <가리워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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