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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Jul 31. 2018

어린이집 언제부터 보내야 할까? 당장 보내도 괜찮을까?

못난 엄마라면 죄책감에 시달릴 때

                                                                                               

‘적어도 세 돌까지는 엄마가 끼고 있어야 한다.’ 
‘엄마 품보다 좋은 게 없다.’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엄마는 제정신인가?’
‘어린아이를 두고 직장에 나가는 엄마는 이기적이다.’



                                                                                               

수많은 육아서와, 수많은 전문가,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고, 저는 누구보다 충실하게 그들의 말에 따랐습니다. 나보다 아이를, 일보다 육아를, 기관보다 엄마 품을 우선시하며 아이를 돌봤던 1년 6개월.

약 18개월의 시간 끝에 제게 남은 건 죽지 못 해 사는 하루하루, 당장이라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버둥거리는 하루하루. 나와 아이를 두고 집을 나서는 신랑을 부여잡고 "당신이 그러고 나가면 나는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나눌 사람이 없어. 사람이 없어." 울어대는 하루하루였어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우린 3월부터 무조건 어린이집에 보내는 거야. 당신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다만 몇 시간이라도 아이와 떨어져 있을 수 있어야 해. 18개월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게 뭐 어때? 내가 힘들면 도움을 받는 거야. 지금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어린이집뿐이고.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롭고 힘든 걸 왜 억지로 버텨야 해? 그렇게 하는 게 좋은 엄마라고 누가 그래?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이나 그렇게 하라고 해. 우리는 우리대로 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어린이집에 보내는 거야. 다른 선택지는 없어.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그 시간에 뭘 할지, 뭐가 하고 싶은지만 생각해.

-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중에서 

                                                                                                 



18개월밖에 안 된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엄마이길 포기하는 일, 최소한의 자격도 없는 미친 엄마라는 생각에 감히 생각조차 하지도 못했던 어린이집 입소를 결정한 것은 남편이었어요. 
언제나 내 생각을 우선하던 사람이 조금의 여지도 없이 강하게 밀어붙이니 저항할 수 없었고, 저는 그렇게 아이를 18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냈습니다.

워킹맘도 아니면서 18개월밖에 안 된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것이 과연 올바른 행동인가. 
보내기 전은 물론이요, 아이를 보내는 내내 걷잡을 수 없는 회의에 시달렸어요.
집에 혼자 있으면서도 불안불안, 내가 이렇게 혼자 있어도 되는 건가, 지금이라도 달려가 잘못했다 말씀드리며 데려와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부당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넘어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이와 저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삶이 펼쳐졌어요.
저는 조금씩 편안해졌고, 아이는 그만큼 더 안정되었습니다. 
우는 날보다 울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소리치는 날보다 피식 웃어 넘기는 날이, 
절망하는 날보다 그럭저럭 괜찮다 만족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고, 함께 읽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감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고통의 임계점이 매우 낮은 민감한 사람, 작은 자극에도 크게 고통받는 예민한 사람,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아이의 작은 짜증과 울음, 찡얼거림도 내 신경 시스템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극이 되어 수시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데,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리해야 살 수 있는 사람인 데, 하루 24시간 잠시도 쉴 틈 없이 나만 찾아대는 아이와 종일 붙어 있었으니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나 정말 이렇게는 하루도 못 살겠다’ 울부짖은 게 당연했다.              

-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중에서                                                                                    

                                                                                                  

극심한 산후 우울증으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엄마'라는 단어의 폭력성을 깨달았어요.
'엄마'라는 단어가 지닌 보편성은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엄마가 되는 순간 '나'라는 인간이 갖고 있던 개별성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저 '좋은 엄마'라는 틀만이 존재했어요.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나'라는 한 사람인데, 엄마가 되는 순간 '나'라는 존재의 특성을 모두 버린 채 '좋은 엄마'에 맞춰 다시 태어나라니.. 날 때부터 '초예민', '극민감'한 저에겐 작은 것 하나하나가 모두 삐걱대며 어긋날 일이었지요.
                                                  






                                                                                                 

세상은 쉽게 말하고 비난한다. 그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고, 양육의 책임자는 언제나 엄마이다. 대한민국 엄마들 대부분이, 아니 거의 전부가 산후 우울증을 앓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게 정상적인 것일까? 아이를 낳으면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신체적 질병일까?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내 직업과 경력 모두를 내던져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일과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하라 강요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하루 종일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한 채 집 안에 단절되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매일 남편과 함께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과연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중에서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오롯이 엄마에게만 돌리는 세상의 잣대와 기준에 끌려다니지 않겠노라 다짐합니다.
적어도 세 돌까지는 엄마가 끼고 있어야 한다고요? 엄마 품보다 좋은 건 없다고요? 
아빠 품은요? 아빠는 아이에게 불필요한 존재,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가요?
하루 단 한 시간도 아이와 함께 할 수 없는 아빠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 어째서 아빠의 돌봄을 강조하는 육아서는 이토록 찾아보기 힘든 걸까요?
                                                  





                                                                                                 

니체는 ‘선과 악’을 노예의 도덕이라 말한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노예, 거기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인. 진정한 삶의 주인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린 평가에 따라 사는 사람이고, 나에게 좋은 것은 선택하고 나쁜 것은 거부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이라는 니체의 말을 새겨 넣는다.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명령과 죄책감, 수치심과 불안, 두려움은 쓰레기통에 버리겠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나를 비난하는 대신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을 칭찬하겠다. 세상의 잣대가 만들어낸 내 모습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내 모습, 반짝이는 줄도 몰랐던 나의 조각을 찾아 어루만지겠다. 세상이 강요하는 틀에 갇혀 내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다른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으로 살겠다.                 
-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중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 모두가 다른 모습인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엄마들 모두가 다른 것이 당연하잖아요.
아이는 엄마 혼자 책임지고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 당연한 것처럼요.

어린이집 입소 시기를 두고 주저주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엄마들에게 감히 조언드리고 싶어요.
전문가와 육아서, 세상이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나와 우리 아이의 목소리, 우리만의 상황과 처지에 집중하시라고요.

'엄마'라는 두 글자가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듯이,
우리 아이의 '개월수'가 내 아이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어요.
아이와 나의 관계는 오로지 단 하나, 우리만의 특수한 관계이니
우리에게 맞는 삶의 규칙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실천하기.

'~해야 한다'는 강요와 '엄마'라는 보편성에서 벗어난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저는-
엄마여서 행복한 하루, 엄마여도 편안한 하루를 살게 되었습니다. 




                                               


엄마 체질이 아닌 사람, 엄마가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 하루 종일 나만 찾으며 매달리는 아이가 부담스러워 숨이 막히는 사람, 둘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밀려오는 사람


엄마가 되는 게 너무도 힘들어 무너지고 또 무너졌던 한 여자의 이야기, 못난 엄마라는 죄책감에 시달릴 때 그녀를 구원해 준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 당신을 위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으시다면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2장 '서재에서 놓은 마음'을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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